평일 저녁 해변 공원의 분위기

낭만으로 가득 찬 킷실라노 비치에서 느낀 슬픔

by 조각

밴쿠버에 도착했다. 일하라 해외 이사 준비하랴 사람들과 인사하랴 정신 없던 한국에서의 몇달을 보낸 후 10시간의 비행, 긴장 속의 비자 심사를 거친 후 겨우 겨우 한달 간 묵을 숙소에 도착했다. 환상적인 여름이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밴쿠버는 너무 추웠고, 가지고 온 옷을 겹겹이 입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며칠 간 시차 적응이 되지 않은 채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보니, 어느새 먹구름은 사라지고 파란 하늘과 초록의 밴쿠버가 짠 하고 나타났다. 흑백 화면이 갑작스레 선명한 색상을 갖춘 것처럼.


신랑과 나는 첫 나들이를 하기로 했다. 머나 먼 곳에서 짧지 않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서, 여기가 밴쿠버야 ! 하고 당장에 알 수 있는 장소를 고민했다. 언젠가는 바다가 있는 곳에 살고 싶다고 자주 꿈꿨던 나는 제일 먼저 해변 공원을 가고 싶었고, 우리는 피크닉매트와 캠핑용와인잔을 챙겨 버스를 타고 킷실라노 비치로 향했다. 평일 저녁에.


와인샵에 들려 캐나다 오키나와는 밸리 와이너리에서 만든 로제와인을 한병 사고, 샌드위치와 치즈 몇조각을 사서 들뜬 기분으로 킷실라노 비치로 걸어가면서 우리는 마냥 관광객처럼 들떴다. 여름엔 해가 9시가 넘어서야 져서 대낮 같이 환하고, 온통 커다란 나무들이 햇살에 반짝이고, 생각하던 공원보다 10배는 넓은 듯 느껴지는 잔디밭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까지. 아주 특별한 나들이를 할 수 있어 설렜다.


나무 그늘에 피크닉 매트를 깔고 편히 앉아 캐나다산 와인을 홀짝 마시면서 우리는 몇 달 간의 지치는 날들을 잊고 앞으로 경험 할 새로운 생활을 어림잡아 보았다. 말도 안돼, 비현실이야! 하면서. 그러면서 주위를 천천히 구경했다. 이 다채롭고 선명한 풍경을 꼼꼼히 눈에 담았다.


그러다가 덜컥, 깨달았다. 우리에겐 너무나도 특별한 나들이가 이들에게는 평일 저녁의 일상이라는 것을. 평일 저녁 6시였다. 우리에겐 '칼퇴'를 해야만이 회사에서 나설 수 있는 시간. 그런데 이 눈부신 풍경을 완성하는 건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기타를 치며 버스킹을 하는 사람, 친구들과 잔디밭에 앉거나 누워 대화하고 있는 사람, 가족들과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며 웃는 사람, 여럿이 모여 비치볼을 하는 아주 많은 사람 -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남녀노소가 모래 위에서 비치볼을 하고 있었다. 열정적으로 - 한편에서 둘씩 짝을 지어 춤(아마도 살사 댄스?)을 추고 있는 사람, 큰 개와 함께 걷거나 뛰고 있는 사람. 벤치에 앉아 고요히 책을 읽는 사람.


약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좋아서가 아니라 슬퍼서. 이 생동감 넘치는 사람들을 보며 지난날의 내가 생각나고, 각자의 자리에서 지쳐 가는 친구들이 생각나고, 짧은 점심시간 커피 타임에 스트레스를 나누는 동료들이 생각나고, 늦은 새벽 택시 타고 집에 들어오는 동생이 생각나서. 우리가 아주 가끔 만나 맛있는거 먹고 좋은거 하면서, 그래 이럴려고 돈번다! 하고 서로를 토닥이고 애써 힘을 내던 특별한 주말들이 생각나서.


슬퍼하다 말고 다짐했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배워가자고. 2년의 시간이 흐른 후 우리나라의 근로 문화가 어떨지는 잘 모른다. 출렁이는 변화 중에 있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본 평일 저녁의 이 반짝임이 오직 짧은 근로 문화에서만 오는 것은 아닐테니까. 물론 네 시면 퇴근할 수 있음이 제일로 중요하겠지만 그건 내가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 사람들의 태도를 배워가자고 마음 먹었다. 행복 한가운데서 느낀 낯선 슬픔이 나를 다르게 이끌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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