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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주인은 당신의 원칙이다.

by 황금지기

성급함은 그릇에 금이 가게 하고, 욕심은 그릇을 깨뜨리는 법, 욕심 있는 곳에 미련이, 미련 두는 곳에 후회가 있다. 확률적인 것들에 침묵하면서 인내하지 않고 성공을 논하는 건 늘 시기상조, 손실을 맞닥뜨리면 누구나 돌리는 희망 회로, 선순환을 깨뜨리는 도화선이다. 군중 속에서는 생각하게 되지만, 언덕 위에서는 바라보게 된다. 원칙 안에서 머문 과거의 길이만큼 성장한다. 시행착오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칙적이어야 한다. 감정의 들불이 번져 원칙이 부러지면 ‘반드시’는 늘 ‘어차피’로 반복될 뿐이다.




시장의 방향은 단기적으로는 동전 던지기와 같은 우연의 연속이어서 프로와 초보의 실력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바카라가 베팅의 기술인 것처럼, 투자도 베팅을 조절하는 자신의 심리에서 결정 난다. 예측해서 이겨내는 게임이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고만고만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제각각인 시장의 본질을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한판 한판은 엄연히 다르다. 출발선부터가 다르다는 말이다. 하수는 여전히 투자를 어떻게 이기느냐의 게임으로 접근하지만, 상수는 어떻게 돈을 관리하느냐의 게임으로 접근한다. 무슨 일에도 원칙을 바꾸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돈을 관리할 수 있다. 돈을 관리하는 주체는 마음이 아니라 반드시 원칙이 되어야 한다. 두말하면 잔소리, 당신 돈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원칙이다. 원칙에 대한 인식 차이가 바로 위험에 대한 인식 차이다. 곳곳이 위험, 위험에 포위되어 있다. 원칙을 자꾸만 부러뜨리는 하수가 버텨낼 여지는 거의 없다. 게임 전에 정한 건 일단 게임이 시작되면 절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바카라는 선량한 사람이 아니면 이기기가 매우 힘들다. 선량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주변을 존중하며 주변의 것을 받아들일 줄 안다. 반면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고집하는 사람은 바카라를 둘러싼 그 수없이 섬세한 요소와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패배를 거듭하게 되어 있다. 바카라는 한마디로 비유하자면 조그만 고개를 들어도 돌아가고 있던 날카로운 프로펠러가 목을 '탁' 치는 그런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늘 자신을 낮추는 선량한 사람만이 항상 고개를 낮추고 있어도 거부감이 없고, 불편하지 않아 그 프로펠러에 목을 내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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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동은 등락하면서 되풀이될 것이다. 인간의 성급함과 욕심이 간단한 일을 (등락하는 마디에서 주사위를 던지고 거두는) 어렵게 만드는 것도 영원히 되풀이될 것이다. 눈에 돈이 보이면 어찌하겠는가? 그릇 크기만큼만 가져올 수 있을 뿐이다. 성급함은 그릇에 금이 가게 하고 욕심은 그릇을 깨뜨린다. 스스로 만든 원칙으로 경험적 통찰을 키워야 그릇도 커진다. 경험적 통찰이 그릇의 크기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시장의 흐름은 통제할 수 없지만, 자신의 변화는 통제할 수 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통찰은 스스로 고개를 낮추게 한다. 낮추면서 선량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변화이고, 그것이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다.




「주식시장은 어떻게 반복되는가?」에서 켄 피셔가 강조했듯이 맞추었다는 자만심에 찬물을 퍼붓다가도 다시 맞춰주면서, 교묘하게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성급함과 탐욕이란 약점을 자극하는 시장은 모욕의 달인이다. 군중을 먹잇감 삼는 모욕으로부터, 인간 본성의 위험성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언덕 위로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는 용기가, 노력이, 끈기가 없이는 군중 안에서 소수를 꿈꾸지만, 꿈꾸는 군중과 매한가지일 뿐이다. 겨울잠을 자다가도 갑자기 상상도 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뇌를 차지하고 마는 욕망을 조금씩이라도 붙잡아 두기 전에는 어림없는 일이 투자다. 시장은 끊임없이 자제력을 테스트한다. 평상시가 아니라 참아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평상심이 진짜 평상심이다. 좋을 때 평상심은 누구나의 것이지만, 나쁠 때 평상심은 아무나 가지기 힘든 마음이다. 말을 아끼는 것만큼, 원칙 자리를 기다리는 위해서는 강한 자제력이 요구된다. 근거가 확보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논리가 확보될 때까지 말을 아끼는 게 진짜 평상심이다. 뇌동이나 추격으로 진입하는 건, 말을 많이 하는 건 욕심 때문이다. 욕심 있는 곳에 미련이, 미련 두는 곳에 후회가 있다. 여유로움은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감사한다는 건 만족한다는 것이고, 만족한다는 건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위험을 줄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욕망을 붙잡아 두는 것이다.




이겼을 때의 그 쾌감과 현실적인 이득이 있으므로 지난번에 이겼는데 이제 끝낸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이겼기 때문에, 또 하게 되어 있고, 그래서 자기가 항상 이기는 인간으로 만들어 두지 않으면 한때 이기고 한 때 돈을 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결국은 죽는데 죽기 전에 물 한 모금을 더 마셨느냐 안 마셨느냐의 차이가 딴 사람과 따지 못한 사이에 있을 뿐이다……, 한 때 아무리 성적이 좋다 하더라도 그것이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것이 아니면 결국 가는 길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바카라란 얼마나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느냐 하는 게임이고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길은 그것이 도박이든 학문이든 정치든 도를 닦는 것이든 다 똑같다……, 마치 도를 닦듯이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자기 생각 하나하나 동작 하나하나에 진심과 진지함과 엄숙함을 담고 항상 위험을 경계하고 돌다리도 백번 두드려 보는 자세야말로 인생이나 도박이나 똑같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도박은 참으로 인생을 많이 닮았다. 인생이나 도박이나 요행을 바라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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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태도는 침묵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는 침묵해야 하듯, 확률적인 것들 역시 침묵하는 편이 현명하다. 수익률도 복리지만, 실력도 복리다. 임계점까지 버티기만 하면 가팔라지지만, 거기까지 도달하기에는 불확실성의 안개가 의지를 압도하고도 남을 만큼 지나치게 자욱한 게 문제다. 문제의 출처도, 어려움도 명확하다. 스스로 풀어내야 한다. 자신이 채점한다는 것이 더 문제지만 말이다. 복리는 인내심이 주는 선물, 근시안적 인간 본성과 거리가 멀기만 하다. 성공하는 투자자가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확률적인 것들에 침묵하면서 인내하지 않고 성공을 논하는 건 늘 시기상조다. 인내는 노력의 꽃, 결국 노력 없이 그저 얻을 수 있는 건 시장에 없다. 보통 인간은 심리적 기제 자체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거슬러 올라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서 황금을 발견하겠다는 의지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향하는 노력이다. 원칙이 아닌 자리에서는 하지 않는 게, 애매하거나 어려우면 보내는 게 현명한 침묵이다.




게임에서 지는 날이란 대략 안 되는 날에 속할 것이다. 이를테면 게임을 빨리 줄이거나 포기하고 몸을 빼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가 자신의 조그만 실수를 극복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질 때 매우 잘해야 한다. 그때 잘해두면 다음에 이기는 찬스가 찾아오고, 질 때 잘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깨 버리면 이기는 기회는 영영 오지 않는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생이란 늘 실패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성공을 꿈꾸지만 꿈은 깨지게 마련이고, 계획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꿈이 깨지는 것을 하나하나 겪어 나가는 것이다……. 실패라는 것은 마치 달이 차고 기울 듯이 봄이 오고 겨울이 오듯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순환하는 것이다. 실패와 성공 사이에는 사실 큰 차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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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실을 맞닥뜨리면 누구나 돌리는 희망 회로, 이게 선순환의 지속성을 깨뜨리는 도화선이다. 방아쇠를 자꾸만 당기는 범인은 (손실을 회피하게 하는) 본전 심리다. 손실로 마무리한 이후 그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의 부족, 즉 막연한 기대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실력의 부재다. 본전 심리는 인간의 디폴트 값이다. 손실 회피 편향의 극복, 그 너머에서 길은 이어진다. 손실을 자르는 건 극복의 문제다.




크게 크게 보면서 주가의 위치를 가늠하는 건 가능성의 영역이므로 천장권과 바닥권은 알 수 있다는 전제는 전제로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좁은 등락에서 고점과 저점을 찾는 건 불가능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마음공부가 뿌리를 내리기 전에는 고점과 저점 찾기에 여념이 없다.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한다. 나쁜 습관에 소중한 시간을 보태면서 습관의 몸집을 불리고 만다. 투자는 주가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천천히 길게(시간에 기대어서 꾸준하게) 지속가능성의 고원으로 가는 길이다. 고점과 저점을 좇아 빠르게, 짧게 집으로 가는 길 위에서 군중은 방황한다. 솔직해지자. 장기투자가 어려운 이유는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변동성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필연의 등락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실력의 문제다. 솔직해지자. 원칙을 지키는 게 어려운 이유는 그 과정에서의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을 제대로 다루지도 가만히 있지도 못하는 실력의 문제다. 투자 행위는 투자물 자체가 아니라 가치를 부여하는 각자의 생각이나 판단과 같은 심리를 사고파는 것이다. 심리가 강하게 부딪치는 자리에서 파동은 전환하면서 등락한다. 심리가 요란스럽게 부딪치는 마디를 언덕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어야 확률은 높아진다. 군중 속에서는 생각하게 되지만,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바라보게 된다. 현상을 마주하면서도 생각한다는 건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참 더 깨져야 한다는 (한참 더 공부해야 한다는) 의미다. 현상은 생각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대상이다. 자신의 심리를 사고파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심리를 알아채지 못하면 타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파고들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지 못하면 성공을 논할 수 없다. 투자는 심리 게임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보니, 기회란 흐름 속에 앉아 있다 보면 언젠가 오는 것이었다. 내 인생에는 그런 기회가 어마어마하게도 많았다. 기회라기보다는 마치 순리처럼 내게 찾아온 일들이었다. 그러니 매일의 순간순간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되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내일이 있다는 것을 핑곗거리로 삼지 않았다. 내일이 있으니, 오늘은 어떻게 되는 괜찮다는 마음가짐으로 사는 게 아니라,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내일이 와 있는 삶을 살고자 했다.

<인생은 순간이다 – 김성근>

각자가 정한 원칙의 강을 건너 원칙 안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해야 한다. 현재에서 다짐하고 미래를 막연하게 기대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아무나'의 몫이기에 과거는 늘 원칙 밖에 있게 된다. 과거와 현재가 원칙 안에 있어야 찬란한 오늘이 연속된다. 원칙 안에서 머문 과거의 길이만큼 성장한 것이다. 매일 달아나는 오늘은 과거로 흘러가지만, 성장의 뿌리가 된다. 단단한 뿌리는 원칙 안에서의 찬란한 오늘이었던 과거다. 그렇게 미래는 막연한 기대의 대상에서 영원회귀의 오늘이 된다.




결과를 의식하는 사람들은 어떤 벽에 부딪히면 부딪히자마자 ‘안 되겠다.’ 지레 겁을 먹어버린다. 아이디어가 생각이 나도 머뭇거리며 스스로 제동을 건다. ‘과연 될까? 안 되지 않을까?’ 하면서 의심부터 하는 것이다. (중략) 물론 떠올린 아이디어가 막상 틀린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단 말인가. 틀리면 또 다른 문제점을 발견하고, 힌트를 얻을 수 있으니 오히려 좋다. 문제를 해결하면 길이 열리니까. 일단 시도하고 실패하면 다시 고민하고, 또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려 내서 또 시도하는 것, 그것이 시행착오다.

<인생은 순간이다>

원칙 안이라면, 실수는 단지 시행착오적이다. 시행착오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칙적이어야 한다. 원칙적인 시간은 선순환을 담보한다. 투자 과정에서 경험하는 실수는 (커다란 실패마저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끊임없이 내어주어야만 하는 대가다. 성장하기 위해서 겪게 되는 성장통처럼 말이다. 투자에서의 성장통이란 자신에게 일어날 내일 몸의 상태나 기분을 알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되는 과정이다. 내일 일을 예측하려 들지 않고 그것을 넘어 흐름에 순응하는 마음 먹기를 거듭하는 과정이다. 사춘기나 젊은 시절 더디기만 느껴지던 시간처럼 대가를 지급하는 시간은 아주 천천히, 자기 안에서 지루하게 이루어진다. 투자자라는 나무로 제대로 뿌리 내린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다.




태생이 긍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상황이 오면 당황한다. 처음 자기 머릿속에 구상하지 않았던 게 나타나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며 얼뜨기같이 굴다가 십중팔구 거기서 다 무너진다. 그러나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온갖 상황을 미리 상상해 놓는 사람은 부정적인 상황이 와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어차피’, ‘혹시’ 그리고 ‘반드시’라는 말이 있다. 나는 ‘어차피’ 속에서 ‘혹시’를 만들어 내는 게 최고의 인생이라고 본다. ‘어차피’는 안 된다는 뜻, 그러니까 최악의 상황이고 ‘혹시’는 조그만 희망이다…, 나는 ‘어차피’ 속에서도 ‘혹시’라는 가능성을 무궁무진하게 상상하고 그것들을 ‘반드시’로 만들었다…, 이길 것 같을 때는 비관하고 질 것 같을 때는 오히려 낙관하는 것, 그게 무엇이 다가올지 모를 인생의 순간순간에 가장 최선의 ‘준비’인 것이다.

<인생은 순간이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전 경험으로 알고 있는 부정적인 상황을 매번 가정하지 않으면, 투자자의 ‘혹시’는 늘 ‘혹시’로 반복될 뿐이다. 감정의 들불이 번져 원칙이 부러지면 ‘반드시’는 늘 ‘어차피’로 반복될 뿐이다. 결국 현명한 투자자는 암담한 투자의 세계를 직시하면서 그럼에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결과를 만들어 가려는 회의론적 낙관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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