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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BI Sep 30. 2022

파이트히비 프로젝트

파이트히비 프로젝트의 시작

fight hibi 에서 hibi는 키코모리+만에서 앞 글자를 떼어 내가 만든 단어다.

즉, fight hibi = 히키코모리, 비만과 싸운다는 뜻이며 더 나아가 "히키코모리와 비만에서 벗어나자!!"란 뜻이다.


난 이제 불혹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히키코모리이자 초고도비만의 인생 실패자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2년 넘게 지속되니 이제는 이런 지긋지긋한 죄책감과 자괴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20살이 되기 전에도 30살이 되기 전에도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40살 병에 걸려 불혹을 앞두기 전 몇 달 안 남은 시간을 인생의 전환점이라 생각하고 나 자신을 바꾸고 싶어졌다.

아무리 대인기피증에 걸린 히키코모리라 가족과도 연을 끊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일 아니면 현관문조차 나서지 않나였지만 매일 밤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자살밖에는 남지 않게 될 것 같아'라는 생각이 날 집어삼키고 공포심에 짓눌려 잠들 때마다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아'라는 생각 또한 샴쌍둥이의 머리처럼 옆에서 나란히 두둥실 자라났다.

나도 아예 노력을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1년 전부터 이렇게 살면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살고 있는 건물 지하에 있는 헬스장을 끊어 매일 1~2시간씩 운동을 했다. (건물 밖을 나서는 일은 한 달에 한 번도 되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건 여전했지만)

하지만 몇 년 동안 몸과 정신을 잠식해 갔던 '은둔 생활'이 하루에 운동을 몇 시간 한다고 해서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날 리는 만무했다. 그나마 내가 하루 중 유일하게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건 하루에 한 번은 무조건 운동을 하는 것. 365일 내내 지키진 못했지만 90% 이상은 지키며 운동을 1년 동안 하는 동안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건물 안 실내 공간의 운동은 한계가 있었고, 몇 년 전부터 생긴 공황장애 초기 증상 중 하나인 '선 공포증' 등의 증상으로 가끔 건물 밖을 나가는 것조차 힘들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이 정확히 '선 공포증'인지는 모르겠다. 예전엔 아무렇지 않았던 포인트에서 온몸에 쭈뼛 소름이 돋으면서 괴로웠고 한 번 그런 경험이 있으면 그 후 그 포인트만 떠올려도 온몸에 닭살이 돋고 오한이 들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말풍선만 봐도 말풍선의 볼록볼록한 선들이 징그럽게 느껴지면서 소름이 쫙 돋았고 그 이후에는 말풍선만 떠올려도 힘들어졌다. 좀 굵게 바느질된 옷이나 가방만 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닭살이 돋았다. 한약 봉지를 바구니 안에 세워서 넣어놨는데.. 그 봉지들이 일정하게 놓여 있지 않고 마구잡이 선형으로 놓여있으면 그걸 봐도 며칠은 괴로울 정도로 힘들었다. 그저 약봉지가 놓여있을 뿐인데도 날카로운 괴물의 형상처럼 보였다.

... 말풍선, 바느질, 약봉지가 이렇게 무서워질 줄은 나도 몰랐다.

그리고 산책을 30분 정도만 해도 온몸이 미친 듯이 가렵고 미쳐버릴 것 같은 공포가 몰려들곤 했다.

뭔가.. 세상이 날 공격하는 느낌? 조금만 길이 더럽거나 집 근처 공원을 거닐다 보면 흙바닥이 나오는데.. 흙바닥이 갈라진 모습만 봐도 무서울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깊어져 자꾸 연락을 피하게 되었고 결국 연락하는 지인의 수가 몇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 몇 명도 가끔 문자가 오면 답을 하는 정도였고, 누군가를 직접 만나 마주 건 2년도 훌쩍 넘었다. 내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게 너무 무서웠다. 특히 날 아는 누군가가 지금의 내 모습을 알지 못했으면 했다. 이게 대인기피증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심할 때는 엘리베이터에서 타인과 마주치는 것도 견디기 힘들어 새벽 3, 4시에 쓰레기를 버리러 갔던 시기도 있었다. 운동도 사람이 많이 없는 시간 위주로 다녔다.

점점 '내가 정말 미쳐가는구나'싶었고 이런 증상이 계속해서 발전한다면 다시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렇게 더 계속 살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살긴 살아도 정말 비참하게 살다 죽을 것 같았다.

어릴 때 봐서 기억도 잘 안 나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의 마츠코와 내가 자주 오버랩되었다.

나도 모든 변명하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이런 삶은 아니었다.

"너의 결혼식에는 지인만 200명도 넘게 올 거 같아"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인간관계가 두터웠고, 하루를 오전, 오후로 나눠 하루에 2번 이상 약속을 잡아도 2달 정도의 스케줄이 미리 꽉 찰 정도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아주 날씬하고 건강한 몸은 아니었지만 30kg가 넘게 찐 지금보다는 그때가 훨씬 건강하지 않았을까?

평범한 직장, 평범한 인간관계, 평범한 가족 관계, 평범한 외모... 나도 그렇게 평범한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인생이 곤두박질치는 데는 불과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러다 아까 언급했던 '불혹 병'이 다가오자 인생을 리셋하고 싶다는 마음에 가족과도 연락을 아예 끊었고, 몇 명 남은 지인들과도 모조리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내 곁에 남아 있으면..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고 또 주저 않게 될 거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삶이 변하길 원하면 철저히 나 혼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려야 비워지고 비워져야 채울 수 있다는 진리가 계속 맴돌았다.

어찌 보면 모순적인 얘기일 수도 있다.

히키코모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히려 더 혼자 남기를 선택했다니.

하지만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혼자'라는 사실이 극도로 두려워지자... '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짜 달라져야 한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가족과도 인연을 끊겠다 선포한 나였기에.. 큰 불효를 저지른 부모님의 얼굴을 다시 보기 위해서는 꼭 달라져야 했고, 달라진 내가 아니고선 연락할 면목이 없게 돼버렸기 때문에 소중한 인간관계를 빨리 바로잡기 위해서는 내 인생 먼저 바로잡아야겠다는 의지와 다급한 마음이 생겼다.

그동안은 그래도 지속적으로 날 돌봐주는 가족이 있고 가끔은 연락을 주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안일하게 변화하고자 하는 절박함 없이 계속 우울함에 침전되어 있었던 거란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다고 맨날 읊조렸지만.. 정작 너무나 잘 살고 싶었던 난.. 혼자 남게 되자 죽음보다는 오히려 변화를 택하게 되었다.

'빨리 제대로 된 삶을 찾아서 당당한 모습으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다. 마지막까지 나에게 힘을 주고 응원했던 친구에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사고 싶다'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만의 파이트히비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정말 벗어나자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건물 밖으로 나가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고민 끝에 찾은 첫 번째 방법은 생계를 위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4시 반에 일어나기, 요가와 명상으로 하루 시작하기 등등.. 뭔가 삶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이 실천하는 유행에 휩쓸렸지만 늘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그래서 좀 더 현실적인 방법을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일을 맡겼을 때 책임감 하나만큼은 스스로가 인정할 만큼 성실했기에 '돈을 버는 일을 하자'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군가와 약속을 하면 꼭 지켜야 하는 성격이기에 일만 시작할 수 있다면 나머지 부수적인 일상들은 자연스럽게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모든 관계를 단절했기에 모아둔 돈이 전부 떨어질 때를 대비해 생활비가 절실했던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했던 첫 회사를 시작으로 한 번의 휴직도 없이 11년을 근속했던 나였기에 4년 간의 백수생활은 스스로를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으로 치부하는 경멸 가득한 자괴감 괴물로 만들었기에 어떤 일이든지 시작해 보고 싶었다. 최근 몇 년 간의 은둔 생활 때뿐만 아니라.. 내 나이가 한자리였을 때부터 불면증과 수면장애로 한 번도 편하게 자본 적이 없었던 삶이었기에 나에게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에 자는 것이 무엇보다도 간절한 평생의 숙원이자 버킷리스트였는데 일을 시작하면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에 자는 일상적인 습관을 잡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란 소망도 있었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듯... 일을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한 숨도 못 자고 밤을 새우고 출근한 적이 부지기수. 당연히 지각이나 결근은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처음으로 도전한 일은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단순 아르바이트여도 뭔가를 배울 수 있는 곳에서 일을 하고 싶었고 4년 전 인생 실패자의 문턱으로 들어서기 전 한 번 도전했었다가 아무 연락도 없어서 떨어졌구나 단념했던 곳이었기에 이력서라도 다시 넣어보자 라는 마음으로 이력서를 제출했다. 4년 전에는 창피하게도 자의식 과잉으로 엄청난 포부를 내포한 이력서를 제출했었기에 이번에는 거품을 모두 뺀 담백한 이력서를 제출했다. 사실 이미 한 번 떨어진 곳이었기에 애써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데 일주일 안에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왔고 지금 2달째 열심히 일하는 중이다. (일하다가 서러워서 쉬는 시간 휴게실에서 남몰래 엉엉 통곡했던 일과 출근 전까지 용기를 잃지 않기 위해 평생 잘 나가는 엘리트 인생이었지만 60세의 나이에 같은 브랜드의 커피숍에 취직하게 된 예일대 출신 백인 남성의 에세이 책을 중고 서점에서 겨우 구해 읽었던 일 등등의 에피소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나열하겠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물꼬를 틔우고 나니 도보 배달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도보 배달은 1년 전에도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마음에 에 가입하고 교육까지 들었지만 살고 있는 건물 내의 음식점에서 알람이 울렸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용기를 내지 못해 수락하지 못했고, 그렇게 첫 주문을 날리고는 다시는 앱을 켜지 않았었다. 내가 도보 배달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게임 퀘스트를 깨듯이 배달 한 건을 완료하면 배달비로 보상을 받고, 점점 쌓이는 배달 건수와 배달비로 꼭 게임 속에서 레벨 업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고, 그렇게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하루에 몇 시간 이상을 걷게 되니 자연스럽게 살도 빠질 테고.. 히비 탈출에 딱이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무서워서 1년을 미뤘던 도보 배달도 막상 의지를 가지고 시작하니 금방 적응이 되었다.

그렇게 현재는 커피숍 아르바이트와 도보 배달을 병행하면서 조금씩 일상과 가까워지려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파이트히비 프로젝트의 두 번째 계획은 글을 다시 쓰는 것이었다. 힘들 때마다 관련 주제의 책과 영화에서 영감과 위로를 받고 그에 대한 감상을 적고 글을 쓰며 마음을 다잡던 예전 나의 모습이 사무치게 그리웠기 때문이다. '글을 다시 쓰기'는 지금 쓰고 있는 브런치를 시작으로 앞으로도 꾸준히 어떻게 나의 일상이 변화하는지 글로 공유해볼 예정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면 4년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쓸 예정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처럼 우리의 삶은 오늘도 내일도 이어진다.

그러니 모두 지리멸렬한 삶 속에서도 한 줄기 따뜻한 위로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밑에 사진들은 도보 배달 중 '그래도 삶은 여전히 아름답다'라고 생각 들었던 순간을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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