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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BI May 19. 2023

오늘부터 금주 시작....?

과연

난 20년 가까이를 가족이나 지인들로부터 알코올중독증이 아니냐는 말을 듣고 살았다.

요즘에서야 알코올의존증, 알코올사용장애라는 좀 더 죄책감이 덜 느껴지는? 말을 많이 쓰지만 20년 전만 해도 알코올중독자 또는 알코올치매라는 단어만 사용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처음 술을 접했던 건 중3 때 친하게 지냈던 10명의 무리들과 함께 친구의 빈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그때 당시 처음으로 리큐어 소주인 레몬소주가 출시되었는데 그날 레몬소주 1, 2병을 한 모금씩 나눠마셨던 기억이 난다. 10명 모두 반에서 성적이 1등~10등이었을 만큼 공부밖에 모르는 순진한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고1 수학여행 때도 술을 접했었지만 전학 온 지 며칠 안된 아웃사이더였던 나는 조용히 술을 받아마시고는 알딸딸하게 취해 혼자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컵라면에 정수기의 찬물을 붓고는 어이없음에 낄낄댔던 기억이 난다. (소름 돋게도 이때부터 시작된 '술 마시고 난 직후 라면 먹기'의 습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고3 때의 수능 100일주를 시작으로 나의 알코올사용장애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때 당시 다니던 독서실 근처 호프집에서 100일주를 핑계로 친구 2명과 소주를 아무 제지 없이 들이킨 나는 결국 기억을 잃고 쓰러져 독서실 등하원 봉고차에 실려 집에 왔고, 빌려 입은 언니의 새 정장은 토사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다음날 살면서 처음으로 숙취라는 것과 마주했고, 하루 종일 양호실에서 빌빌대다 나를 데리러 온 언니가 사준 해장국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잘못 시작된 나의 음주 습관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넌 술만 안 마시면 다 좋을 텐데..."라는 말을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들었던 것 같다.

생일이 빨라 19살에 대학생이 된 나는 19살 때부터 40살인 지금까지 아주 꾸준히, 진득하게 술을 마셔왔다.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냐면.. 주중에도 회사 회식이 끝나면 9시고, 10시고 친구를 만나 또 술을 마셨고, 회식이 없는 날에는 친구와 3, 4차까지도 달렸다. 주말은 하루에 약속을 두 탕(심지어는 세 탕까지)으로 잡기도 일쑤였고, 한번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한자리에서 2병은 기본이고 거의 3병을 혼자 비워냈다. 1차, 2차의 개념이 아니라 약속 1건 기준으로 일주일에 술을 마시는 횟수가 평균 8번 이상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는 주사도 심했다. 늘 뻗을 때까지 술을 마셨다. 술을 조절하는 법을 몰랐다. 술을 마시다 기절해서 쓰러지면 그게 술자리의 끝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심해진 우울증으로 3년 내내 아웃사이더였던 난 대학에 들어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생기를 찾았고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술자리가 너무 즐거웠다. 소심하고 조용하던 난 술만 들어가면 분위기 메이커가 됐다. 낯가림이 심해 평소에는 말도 잘 못 붙이던 내가 술자리에서는 인싸가 됐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내면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던 우울은 술이 날 집어삼키고 난 후면 어김없이 그 추악한 민낯을 드러냈다. 가장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남자친구라고 생각했던 건지 남자친구와 술을 마시면 늘 죽고 싶다고, 죽어버리겠다고 윽박을 질렀다. 정도는 좀 덜했지만 같은 학과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무리들에게도 종종 그런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밑바닥을 다 보여주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정말 친했던 같은 과 언니가 나에게 편지를 줬다. "너가 정신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지 않는다면 난 너를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아"라는 내용의 편지를. 그 언니는 모든 사람이 천사라고 부를 정도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희생정신이 강한 정말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용기내어 쓴 편지였기에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가 내 나이 21살 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덕분에 그날 이후 술을 마시고 죽겠다고 차도에 뛰어드는 주사는 고쳤지만 그 이후에도 술을 마시면 종종 블랙아웃 상태, 필름이 끊겼다. 필름이 끊겨도 집에는 잘 왔고, 같이 술을 마신 친구들은 내가 취한 줄도 몰랐다고 말했지만 늘 불안했다. 이때부터는 술 마신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같이 술을 마신 일행들에게 "나 어제 무슨 실수 안 했어?"라는 문자를 돌리는 주사가 생겼다. 그런 주사에 사람들은 점점 질려했고 지쳐갔다. 나이가 들면서 주사가 점점 줄어들긴 했지만 술 때문에 소중한 사람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으면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말까지 들었음에도 20년 내내 술에 끌려다니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최근 20년 가까이 마신 술값을 계산해 보니 비싼 양주, 와인, 맥주 기타 등등의 모든 술을 제외하고 (안주 값도 제외하고) 온리 소주로만 계산했을 때도 8,000만 원이라는 돈이 나와서 적잖이 놀랐다.

심할 때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술 생각이 났고 하루 종일 술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난 적어도 마약은 안 하잖아', '그래도 난 적어도 도박은 안 하잖아' '그래, 난 적어도 최악은 아니야'라는 말들로 자기합리화를 하며 문제를 자꾸 뒤로 숨겨왔다.


그러다 최근 어떠한 연유로 대학 졸업 이후 11년 넘게 한 번도 쉬지 않았던 사회생활을 그만두고 3년간의 잉여 생활 + 집에서 칩거하는 생활을 1년 정도 했고, 오히려 그 1년 동안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혼자 바에 가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고, 삼겹살집에서 혼자 고기를 뒤집어 가며 소주를 마실 수 있는 혼술의 최상단 계급인 나이기에 대인관계의 단절이 술을 끊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냥 마흔을 앞둔 불안한 마음에 술이라도 끊자 했던 걸까. 술을 마시지 않는 대신 한동안은 유튜브에 빠지는 등 다른 중독 수단으로 옮겨가긴 했지만 1년 금주는 내 인생에서 정말 혁명과도 같은 경험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걸 19살 이후로 처음 느꼈고, 그동안 술이 얼마나 내 소중한 많은 기회와 인연을 빼앗아 갔는지... 얼마나 많은 돈과 건강을 잃게 했는지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늘 불면증과 만성피로, 심각한 근육통과 과민성대장증후군에 시달렸던 난.. 술을 마시지 않기만 해도 그 모든 문제들이 어느정도는 사라진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동안 난 정말 심각한 알코올의존증이었다는 것을. 그동안은 정말 운이 좋아서 큰 사고 없이 목숨을 부지해왔다는 것을.


그렇게 1년 이상의 금주 후 이제 난 1년에 한두 번 집안 행사가 있거나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의 만남에서만 술을 적당히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거의 매일 반복되어 왔던 술에 대한 의존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히키코모리 생활을 접고 사회로 나오자 다시 업무 스트레스를 핑계로 매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업무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한 달 정도 금주하기, 일하는 전날에는 절대 술 마시지 않기 등의 나와의 약속을 잘 지켜나갔다. 하지만 오히려 업무에 익숙해지자 매일 습관처럼 또 소주를 찾기 시작했다. 스스로 진지하게 따져 물었을 때 정말 술이 마시고 싶지 않은 날조차도 소주를 사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렇게 어제도 난 소주 2병을 비웠다.

이제 난 주사도 없고 혼자 조용히 소주 1, 2병을 비우고는 잠자리에 든다. 필름이 끊기지도 않고 다음날 속이 뒤집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더 이상 살고 싶지는 않다고.

술 때문에 잃었던 모든 것을 후회한지 불과 2년 만에 또 습관적으로 술에 의존하는 내가 너무 싫다고.


과연, 다시 금주가 가능할까?

술을 마셔서 해결되는 감정보다 술 때문에 쌓이는 감정과 문제들이 훨씬 많다는 걸 이미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난 술에 휘둘리고 있다.

술을 마시면 오히려 우울과 불안증이 심해지는 걸 뻔히 알면서도 술을 마시지 않아서 지금 꼭 불행한 것처럼 술이란 악마는 '술을 마시면 금방 행복해질 거야'라는 거짓을 늘 속삭인다.


그래도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오늘부터 금주 1일"이라는 말이 입 안에서만 맴도는 내가 한심하지만...

오늘은 과연 술이란 악마에게 벗어날 수 있을지 생각하며 최근 읽기 시작한 '금주 다이어리'에서 본 글을 남긴다.



명석하고 정열적인 사람이수록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는 악습에 빠지기 쉽다.

과음이라는 악령은 천재적이고 마음이 후한 사람의 피를 빨아먹으며 즐겨왔다.

- 에이브러햄 링컨, 1842년 금주 연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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