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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BI Jun 01. 2023

다시 금주 8일째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블랙아웃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거의 모든 관계를 중단한 지금 (언젠가는 다시 과거의 관계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기에 예전처럼 '연을 끊었다'라는 극단적인 표현은 삼가고 싶다. 그들이 배은망덕한 나를 다시 받아줄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1:1 필라테스 선생님과 피티 선생님, 알바 시간대가 같은 마음이 잘 맞는 20살 어린 직장 동료뿐이다. (내가 아직 철이 들지 않아서인지 요즘 친구들이 너무 어른스러운 건지 난 나보다 10살, 20살 가까이 어린 친구들하고도 예전부터 잘 어울렸었다)


며칠 전 나의 알코올의존증과 금주 선언, 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피티 선생님께서 내 얘기를 조용히 듣다 문득 이런 말씀을 하셨다.


"회원님은 알코올의존증이 아니라 그냥 술을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그 질문에는 나도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도 20년 가까이 스스로에게 저 질문을 하며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알코올의존증을 의심했지만 스스로는 아래의 연유들로 끝까지 부인해 왔다.


술을 많이 마셨다고 큰 사건에 휘말렸던 적도 없고 (술 마시고 밤늦게 귀가하던 길에 오토바이 날치기를 당해 경찰서에 가서 진술한 일이 한 번 있었지만 그땐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만취한 상태가 아니었다), 업무에 크게 지장이 갔던 적도 없고 (몇 시간 넘게 길어지던 전체 회의 도중 3~4번 조용히 빠져나와 화장실에서 구토를 했던 적은 있다),  '아내는 서바이버'에서의 아내처럼 알코올로 죽음의 문턱을 계속 넘나든다든지 대소변 실수를 한 적도 없다.

건강도 아주 좋지도 않지만 아주 최악도 아닌 상태이다. 설탕 덩어리라는 소주를 만 병 이상 마신 초고도비만인데도 아직까지는 당뇨도 없고, 아이러니하게도 어릴 때는 심각했던 위경련과 위염, 장염도 오히려 성인이 된 후 술을 마시자 많이 괜찮아졌다. (스트레스성 위장 질병이었기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밖에서는 화장실을 못 가는 예민한 성격 탓에 유아기 때부터 심각했던 변비와 과민성 대장증후군도 많은 것을 타협한 40살의 지금에서는 오히려 많이 좋아졌다. (지금도 갈 때마다 스트레스는 받지만 밖에서도 화장실을 잘 가는 40살의 무던한 내가 너무 좋다)

한때 1년 내내 매일 빠짐없이 먹었던 순댓국과 소주의 콜라보 때문인지 통풍을 앓았던 적도 있지만 그때도 한 달 동안 절주하자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수치가 안정화됐었다. (통풍과 관련된 웃긴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때 진료받았던 대학병원 의사 선생님이 여성은 원래 여성호르몬이 요산 수치를 없애주기 때문에 통풍에 잘 안 걸리고, 본인도 의사 생활 평생 동안 여성 통풍 환자는 처음 본다고 말씀하셨는데.. 마침 그때 방영 중이던 '막돼먹은 영애씨'에서 영애씨도 통풍에 걸리는 장면이 나왔다는 것이다. 정말 내 인생은 부끄러운 시트콤의 한 장면 같았다.)


거의 20년 가까이 난 알코올의존증이 아니라 애주가일 뿐이라고 합리화를 해왔지만 결국 스스로 알코올의존증이 아닐까 의심 또는 인정하게 된 건... 술을 마시면 늘 블랙아웃(음주 후 필름이 끊기는 현상) 상태에 빠진다는 점이었다.


나의 블랙아웃은 꽤 두려울 만큼 심각했다.


3차까지 4~6시간 이어진 술자리에서 난 이미 1차에서 필름이 끊겼던 적도 수도 없이 많았다. 2~4시간 가까이의 기억이 통으로 날아갔다. (블랙아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필름이 끊기면 정말 그 어떤 희미한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간혹 아무리 필름이 끊겨도 멀쩡히 걸어 다니고 말도 하고 집에도 잘 찾아가는데 기억이 아예 없는 게 말이 되냐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블랙아웃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간혹 블랙아웃 구간 중 안 끊기는 구간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도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기에는 한계점에 다다랐다고 스스로 느꼈는지 4차 노래방에서 늘 조용히 빠져나와 집에 먼저 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한 번은 내가 없어진 줄 알고 1시간이 넘게 온 동네를 지인들이 찾아다닌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부모님께 공손히 귀가 인사를 올리고 잠옷까지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곤히 자는 중이었다.. 물론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두려움과 죄책감이 커졌다. 이러다 정말 늙어서 인지저하증(치매)이란 병에 걸리면 어쩌지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술을 놓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혼자 술을 마시면 블랙아웃 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보통은 혼술을 하면 오히려 빨리 취한다고 하는데 난 혼술을 하면 웬만해선 잘 취하지 않았다. 소주 2병 이상을 마셔도 적당히 취하고 기억도 온전하고, 숙취도 없으니 점점 혼술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혼술 습관도 알코올의존증의 증상 중 하나 아니냐며 여전히 나의 알코올의존증을 의심했다. 혼자 술을 마시는 게 어쩌면 제일 위험하다고도 했다.


나도 정답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지금도 난 누군가와 함께 술을 마시면 대략 80% 이상은 블랙아웃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반면 회식같이 불편한 자리에서는 또 술을 얼마나 마시던지 끝까지 기억의 끈을 놓지 않는다. 나도 이런 날 잘 모르겠다. 나의 이런 이상한 음주 습관은 도대체 언제 어떻게 형성된 걸까?


한참 술을 많이 마시고 (20년 내내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폭음의 연속인 나날이 있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는 심한 건망증 증상도 나타났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제일 친한 친구의 이름조차 생각이 안 나거나 전화번호와 이름까지 외우고 있는 매일 보다시피 한 단골손님을 아예 못 알아 본 적도 있다. 나무를 보며 나무인지는 아는데 나무라는 표현은 생각이 안 나는 등의 증상들이 이어졌다. 그런 증상이 술 때문이었는지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중요한 요점은 나의 수많은 문제에 술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든 안 주었든 술을 마셔서 도움이 될 일은 만무했었을 거란 사실 아닐까? 슬프게도 이 사실은 앞으로도 영원하겠지.


알코올 의존증은 '부정하는 병'이라고 알려질 만큼 환자는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 아내는 서바이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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