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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온 돌보 Sep 06. 2023

같이 걸을까

나는 어렸고, 그녀는 젊었으며 우리의 그런 청춘 도화지 위에 그릴 수 있던 유일한 색깔은 검은색뿐이었다. 그런 힘겨운 생애 한가운데에서도 우리를 거두어준 것은 그녀의 품이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한 번도 나는 부족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버거운 숨소리를 듣는 것이 괴로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가족 모두에게 재앙 같은 소식이었고, 그럼에도 우리는 애써 그 사실을 무시하려 부단히 애를 쓰고는 했다. 시도 때도 없던 기침소리는 집안 곳곳을 차지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중되는 병세에 당연히 생활의 질은 떨어져만 갔고,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우직히 주방을 지키던 유일한 존재가 엄마였음을. 어릴 때는 몰랐던 사실을 나중이 되어서야 깨달은 데에는 생각보다 크나큰 희생이 따랐다. 우리 집 아무도, 집안 곳곳을 단정히 해나가는 일을 할 줄 아는 이는 엄마뿐이었다. 한 장의 수건을 쓰는 데에도 엄마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동생은 여전히 나몰라라였고, 30여 년이 흐르도록 라면 한번 끓여본 적 없던 아빠에게는 가스불만큼 어려운 것도 없었을 것이다. 출가외인인 내가 이따금씩 집을 찾아 정리를 해놓고는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엄마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는 빨랫감을 세탁하고 차곡차곡 개었다. 발바닥이 지글지글하다며 숨을 몰아쉬면서도 청소기를 돌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녀가 살아온 인생의 전부가 그녀가 존재하는 집안 그 자체는 아니었는지.


하굣길, 후문 한편엔 언제나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 잔뜩 풀이 죽어 터벅터벅 걸어오던 나를 기다려주던 하굣길의 그녀가 이따금씩 떠오르곤 한다. 가끔 눈물로 무거워진 얼굴을 들 수 없어 땅바닥에 파묻고 걸어가던 나의 어깨를 한껏 감싸 안아주며 괜찮다 속삭여준 그녀의 목소리를 애써 기억해 낼 때가 있다. 힘들 때면 나를 기다리던 엄마가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엄마는 언제나 내게 중요한 사람이었다.




결혼을 하고서는 얼마간 엄마와 남편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서로를 몰라 발생하던 여러 일의 중간에 낀 나는 그때마다 불편함을 느끼고는 했다. 둘은 노력했지만, 그때마다 어색함이 감돌았다. 그러다 일 년 아니 이 년 여가 흘렀을까, 편한 장모 사위 간은 없다지만 어쩌다 마주쳐도 반가울 그런 정도의 사이가 되었던 듯했다.


그러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 산책에 그가 합류하기 시작했다. 엄마와 나는 여전히 가로등 사이를 헤매었고, 뒤에서 묵묵히 따라와 주던 그가 가끔씩 던지는 농담에 무방비로 노출되고는 했다. 가끔씩 센스를 발휘하는 그의 예절에 엄마는 감동 아닌 감동을 받은 듯했다. 빠르진 않지만, 우리만의 템포로 그렇게 점점 가까워져만 갔다.




신혼은 다 그랬을까. 헤매었던 지난 숱한 시간, 그때마다 우린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었다. 서로가 처음이었던 우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맞추어나가야 할 때마다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던 것은 역시나 그녀였다. 내편이 되어달라며 찾을 때마다 엄마는 세차게 나를 뿌리쳤다. 누구 하나에게 편중되지 않은, 어쩌면 나보다 그의 편이 되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마다 서운했지만 사실은 그것마저 나를 위한 일이었음을 나중이 되어서야 알게 된다.


일련의 일들이 우리를 휘몰아쳐서였을까, 우리 셋은 어느 순간 가까워져 있었다. 부부 상담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현명히 헤쳐나갈 수 있는데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우리의 산책은, 엄마, 나 그리고 남편은 어떤 큰 주제를 가지고 말하지 않아도 즐겁게 느끼곤 했다. 부부생활 새내기를 보내던 지난 시간들, 엄마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쩌면 한참을 더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녀는 우리에게 중요한 존재였다.


그녀의 병을 알고나서부터는 산책할 날이 머지않음을 알게 되었다. 무더위와 큰 추위를 빼고 손꼽을 만큼 몇 없는 좋은 날들, 그래서였을까. 그때만큼 엄마와 산책하는 것만큼 기대되는 일도 없었던 것 같다. 둘에서 셋이 된 날, 그녀는 그런 말을 했다. 나를 잘 부탁한다고.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인생, 행복했으면 좋겠다 읊조렸다. 땅바닥을 지긋이 바라보며 걷던 그가 걱정 말라며 엄마의 손을 맞잡았다. 그때에 순식간에 흘러내리던 뜨거운 눈물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그러다 찾아온 천사의 발걸음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희망이 되어주었다. 엄마 손을 꼭 잡고 찾은 병원에서 아기 천사의 심장소리를 처음 확인하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작고 반짝이던 그 소리를 함께 들으며, 우리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아팠고, 우리는 슬펐지만, 기뻤다. 둘에서 셋으로, 그렇게 셋에서 넷이 된 우리의 산책. 작은 생명의 축복은 잠시동안 우리 아픔을 상쇄시켜 주었고, 어쩌면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꼭 그런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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