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제주

추억의 순간

by 돌아온 돌보


다섯 살 여름 아빠와 처음으로 하늘 높이 날 수 있다는 비행기를 탔다.

목적지는 제주.

짧은 단발머리에 빨간 땡땡이무늬 바지 그리고 까만 고양이 티셔츠를 입은 다섯 살의 내가 처음으로 여행을 한 곳.

파란 유니폼에 하얀 미소가 돋보였던 승무원 언니가 건네주던 오색 색종이를 나는 잊질 못한다.

20년만에 찾은 제주 여행 첫날, 먹었던 올레국수. 줄서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빠는 당시 제주의 한 호텔 인테리어를 담당하던 현장 소장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 가족은 한동안 이산가족을 해야만 했다. 가족이 보고 싶어 참지 못했던 아빠는 급기야 엄마와 우리 남매를 제주도로 부르게 되었고, 우리는 그렇게 뜻하지 않은 제주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입학을 했다.

워낙 내성적이었던 내가 낯선 곳에 디딤과 동시에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일단 언어 자체가 외국어나 다름이 없었다.

지금에나 관광객이 들끓어 외부인에 대한 거부가 덜하지, 그때 그들에게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학교에서 적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을 알아듣는 것도 그들과 친구 관계를 맺는 일도 내겐 몹시도 고역으로 느껴졌다. 더구나 친구 사귀는 법을 몰라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맘에 드는 친구 하염없이 '기다리기'밖에 할 수 없었던 내가 내쪽에서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고 멍하니 혼자 지내는 일들이 대부분 지속되었다. 그러다 내게 먼저 다가와준 소중한 친구 k.


둥근 안경이 제법 잘 어울리던 까맣게 그을린 피부의 나의 k. 그녀와 나는 곧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어릴 적 이혼을 해 결손가정의 상흔을 지닌 그녀의 아픔을 그때는 잘 몰랐던 것 같다. 우린 한없이 유쾌했고 즐거웠다. 하지만 어딘가 어두운 그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어린 나는 어색함에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엄마 아빠와 따로 떨어져 살고 있다며. 그때는 몰랐다. 보이지 않는 그녀의 깊은 우물과 같은 슬픔을 나는 그때 우리의 우정으로 다독여준 것 같다.

k와는 내가 서울로 오고 난 후에도 종종 연락을 하고 지냈다. 스무 살이었을까, 우리의 마지막 편지. 학교 선생님이 꿈이라던 그녀는 사범대에 입학을 하였고, 나는 적성도 맞지 않은 경영대에 성적 맞추기 식으로 입학을 하였다. 우리 연락은 딱 그때까지였던 것 같다.


제주에서 지내는 1년의 시간 동안 어린 나는 빠르게 적응하였다. 처음에는 외지에서 왔다며 거부하던 친구들이 내게 조금씩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했다. 내게 말을 걸자 '응'이라는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와, 서울말 한다'며 즐거워했던 아이들. 지금도 가끔 기분 좋은 나무향기가 풍기던 교실 어느 한구석 내 자리가 떠오르곤 한다.


어린 나는 빠르게 제주말을 배워갔다. 결국 그때 배웠던 제주말 때문에 시골에서 왔다며 서울에서는 따돌림을 잠시 당하는 바람에 원망에 원망을 거듭하였지만. 돌이켜보면 참으로 특별했던 나만의 경험. 엄마는 학교를 다닌 나보다 말 배우기가 느렸다. 우리 옆집에는 백혈병에 걸린 손녀를 보살피는 할머니가 사셨는데, 이따금 텃밭에서 딴 신선한 상추들을 우리에게 건네주곤 하셨다. 그때마다 엄마에게 '썰 푸는 시간'들이 이어졌는데 할머니를 만나고 올 때마다 엄마는 내게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라며 잔뜩 인상에 힘을 주며 툴툴거리곤 했다. 그 때문에 가끔 동행한 내가 '통역'해주는 시간도 더러 있기도 했다.


제주는 돌이 많아서 돌로 지은 집이 예전에는 정말 많았다. 지금도 돌담집을 관광 코스처럼 찾아볼 수 있는데, 지금처럼 아파트가 많지 않던 시절엔 정말로 돌로 만든 집이 많았다. 우리 집은 현장에서 급조해서 지은 집이라 바람에 쉽게 날아갈 법한 컨테이너로 만든 주택이었는데 그래서인지 그때는 돌담집이 무척이나 부러웠었던 기억이 난다.


제주의 사계절은 육지와는 사뭇 다르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 날씨라 그런지 육지보다 여름은 늦고, 겨울도 느리다. 우리집은 컨테이너 집이라 그런지 무더운 여름과 매서운 추위를 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때는 참 힘들다 느꼈었는데 어른이 돼버린 지금은 그때가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무더운 한여름밤, 옥상에 돗자리를 펴놓고 짤막한 두다리를 쭉 뻗고 누워 사랑하는 엄마와 함께 밤하늘의 별을 하나 둘 세며 별 자리를 그렸던 그때 그 시절이 지금은 사무치게 그리운 순간이다.




남편과 나의 제주를 찾은 건 20년 만이었다. 내가 제주를 떠난 게 초등학교 2학년 때였으니 강산이 두 번 바뀔만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보통의 여행이라면 제주도 코스가 정해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조금 달랐다. 이른바 나의 어린 시절 투어였기 때문.


먼저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를 찾았다.

운동장이 얼마나 넓었냐면 절반을 떼내어 골프장을 지을 정도였는데 지금 보니 형편없이 작아 보였다. 아마 내가 잘못 알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날 정도. 기억나는 학교 뒷편 수영장은 종적을 감추었다. 나름대로 그 당시 급식시설도 있고 수영장도 딸린 내기준 '최고급'학교였는데 말이다.

학교 투어를 마친 후 유명 맛집이라는 '올레 국수'에서 허기를 채웠다. 줄 서서 먹는 맛집이었는데 고기 육수가 얼마나 진한지 국수가 아니라 그야말로 고기를 있는 그대로 집어먹는 느낌이 날 지경이었다. 다시 제주를 찾는다 해도 반드시 첫 식당으로 재방문하고 싶은 곳이었다.


숙소는 아빠가 인테리어 참여했다는 한 호텔에서 묵었다. 지금은 어마어마한 관광숙소로 가득 찬 제주이지만, 그때만 해도 그 호텔은 최신식 고급 호텔이었다. 나는 아빠의 자취를 찾아 그 호텔에서 묵자고 남편을 설득하였다. 아빠가 인테리어 했다고 생각하니, 그 생각만으로도 뿌듯하고 가슴 벅찬 순간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낡게 변해버린 벽체부터 오래된 인테리어 가구까지 그때 우리 아빠의 흔적이 하나둘씩 묻어나 눈물이 고였다.

호텔 칵테일바에서의 한잔과 북제주 시내의 풍경


어릴 적 숱하게 찾았던 관광지들을 남편과 함께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바닷바람이 심하게 불어 내 머리카락에 파도처럼 철썩철썩 뺨을 세차게 맞았더랬다.


용두암에서
제주에서 먹은 따뜻한 커피 한잔과 백반

잊지 않고 제주의 오겹살도 만끽했다.


보기만해도 탐스러운 오겹살



3박 4일 짧지만 뜻깊었던 나의 제주.

지금도 내 귓가에 맴도는 그때 그 시절 짤막한 우유 배달부의 신호 '우유 완'.

이미 오래전 일이라 제주말의 한 글자도 내뱉지 못하는 서울 아지매지만 가끔은 그날이 아득히 그리워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나의 곳이다.


까만 단발머리의 꼬마 소녀는 여전히 새파란 지붕 컨테이너 주택 앞마당에서 동생과 함께 참새를 쫓으며 뛰어다닌다.

가을바람 결에 한들거리는 황금빛 갈대밭 사이사이를 뛰어다니며, 참새를 쫓던 우리들은 어느새 퍽퍽한 아줌마 아저씨가 되어 그날의 제주를 그리움으로 애타게 기다린다. 지금은 힙한 식당으로 가득한 제주가 그 아름다움을 뽐내며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나의 제주는. 트럭에 500원짜리 수박이 한가득 실려있던 정겨운 제주로 가슴 깊이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
더는 못 간대두

멈춰 선 남겨진
날 보면
어떤 맘이 들까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 걸
잘도 버티는 넌

자고나면 괜찮아 질거야
하루는 더 어른이 될테니

-잔나비 '꿈과 책과 힘과 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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