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두기의 계절이 다가왔다.
여름의 끝자락을 와락 붙잡고 늘어져 놓아주지 않는 더운 햇볕이 무색하게 청명한 하늘은 '나, 가을이 왔도다' 하는 듯 떵떵거리며 찾아온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높은 하늘 아래 우리의 가을을 마주하니 새콤 짭짤한 깍두기의 맛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어릴 적, 엄마는 그 어떤 김치보다도 깍두기를 자주 내주었다. 무를 썽둥썽둥 썰어 김치 양념에 두루 버무리면 끝이라며 이렇게 간단한 김치가 없다고 했다. 그런 엄마 밑에서 나의 최애 김치는 역시나 깍두기였고, 밥에 깍두기를 잘게 썰어 참기름을 촤르르 두르고 나면 이 세상 그 어느 음식에도 지지 않는 최고의 비빔밥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깍두기는 어떤 음식에도 최고의 궁합을 자랑한다. 아삭아삭한 재미있는 식감에 씹을 때마다 줄줄 흘러나오는 시원한 무즙이 입안을 상쾌히 감싸고 쌉싸름한 고소함이 뒷맛을 책임지는 깍두기는 식욕을 만땅 일으킨다. 그래서인지 깍두기만 생각하면 입안에 침이 줄줄 고이는 것이다.
결혼한 지 9년 차, 이제껏 김치 독립을 하지 못했다.
그 언젠가 독립하겠다며 생각으로만 김치 만들기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에서 거듭할 뿐, 막상 엄두가 나질 않아 시작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나는 평생 엄마 김치를 먹으며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엄마가 내게 손수 김치를 담가 줄 수 있던 순간이 결국엔 추억이 되어버렸고, 병든 엄마에게 손을 벌리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너무나도 슬펐다. 이제는 엄마 김치를 영영 못 먹는단 사실이 슬프기도 했고,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김치를 맛 보여줄 수 없단 짠한 마음이 잇따르는 것이다. 신혼시절, 한겨울 김장김치를 홀로 담그고 택시를 타고 힘겹게 우리 집에 찾아온 엄마를 연락도 없이 왔다며 매몰차게 몰아붙였던 나의 냉혹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만 생각하면 후회막심일 뿐이다. 어찌 그리도 엄마에게 버거운 상처를 쉬이 안겨주었는지, 그날의 내가 참으로 혐오스럽기 짝이 없다.
이제는 절대 먹을 수 없는 엄마의 김치. 내 어린 시절 최고의 반찬 깍두기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나도 자식을 가진 엄마로서, 어릴 적 내가 맛본 최고의 기억을 우리 애들에게도 안겨주고 싶었다. 한낮의 더위에 지쳐서는 시원한 깍두기에 밥을 야무지게 비벼놓고 보리차와 함께 꿀꺽 맛 좋게 삼키던 그 비빔밥을 아이들과 함께 먹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결심한 나의 깍두기, 생애 첫 김치 만들기. 엄마의 손맛을 재현하기엔 나는 많이 부족했지만, 최대한 그날의 맛을 살려 만들기로 작심하였다. 그러기 위해선 몇 가지 재료가 필요했다. 우선 깍두기를 버무릴 대야가 있어야한다. 나는 김치 초보이니 인터넷으로 만만한 크기의 대야를 구매하였다. 가을무로 만들어야 달큰하고 맛있는 깍두기를 만들 수 있다던데, 일단은 만들어보는 것이 최초 목표이므로, 여름 무 두 개와 쪽파 한 단을 사 왔다. 집에 생강과 고춧가루, 멸치액젓, 마늘, 소금, 설탕 등 김치 양념을 위한 재료는 모두 구비된 상태였기 때문에 따로 장을 봐오진 않았다. 김치를 담그기 위해서는 찹쌀풀을 쑤어야 하는 대작업이 따르지만, 나는 대신 찬밥을 이용해 만들었다. 깍두기 담그는 일이 일반 배추김치를 담그는 것보다 쉬운 점 중에 하나는 배추 절이는 작업을 구태여 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숭덩숭덩 자른 무에 김치 양념을 알맞게 버무리고 부족한 간은 소금이나 액젓으로 하면 끝! 드디어 맛있는 깍두기가 완성이 된다.
음식에 꽤나 자신감이 붙었다고 생각하여 해본 내 생애 첫 깍두기였지만, 역시 나는 김치 초보가 분명했다. 담그고 맛보기 위해 한입 베어 물자 미간의 주름이 푹 패여서는 '이 씁쓸하고 아무 맛도 안 느껴지는 김치는 뭐지' 싶을 정도의 그야말로 '무'맛 김치이더라. 자존심이 팍 상해버려서는 김치를 담그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 시간들이 쓸모없이 느껴져 버렸다. 더구나 만들겠다고 난리 부르스를 치고서는 산처럼 나온 설거지 거리를 보니 한숨부터 푹 나오는 것이었다. 결국 엄마에게 SOS를 청하기 이르렀다. 전화를 해서는 한참을 툴툴대자, 엄마는 설탕과 액젓으로 간을 더하거든 하루정도 실온에 김치가 익게 둬보라는 것이었다. 엄마의 마법이 통해서였을까, 다음날 먹어보니 거짓말처럼 김치는 맛있게 아주 잘 익었고, 나는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김치 독립을 성공적으로 해냈구나!
나는 엄마에게 내가 만든 첫 깍두기를 꼭 맛 보여드리고 싶었고, 얼마 안 있어 우리 집을 찾은 엄마에게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시원한 재첩국 한 사발에 따끈따끈 갓 지은 하얀 쌀밥 그리고 새콤한 나의 깍두기를 내놓자 더없는 최고의 밥상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엄마가 깍두기를 맛보는 순간, 엄청난 긴장감이 몰려왔다. 마치 표정도 삼엄한 요리 심사위원들 앞에 선 초짜 셰프가 된 느낌이었다.
엄마는 맛있다고 했다. 웃으며 맛있게 먹는 그녀를 보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이제는 그녀의 김치를 더 이상 먹을 순 없지만, 내가 이렇게 훌쩍 자라 엄마에게 깍두기를 담가서 드릴 수 있구나 하는 뿌듯함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나도 김치를 담가줄 수 있는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이 되었구나 싶어 벅차오르는 감정을 어쩔 줄 몰라했다.
나의 인생 첫 깍두기 대 소동은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비로소 김치 인생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엄연히 말하면 김치 독립을 하진 못했다. 수시로 시어머니께서 때 되면 갖다 주시는 김치로 연명하고 있기에. 그럼에도 나의 첫 깍두기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다. 어린 시절의 향수를 간직한 최고의 음식을 내 손으로 직접 담갔다는 대견함 그리고 아픈 엄마에게 손수 담가 맛 보여줄 수 있었다는 감동, 우리 아들딸에게도 당당히 김치를 해줄 수 있다는 자신감 등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감정의 물결이 파도가 되어 내게 휘몰아치는 것이다.
김치가 이렇게 대단할 일인가 싶다가도, 김치 맛 하나에 반하여 찾는 단골 칼국수 집을 생각하면 엄청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생애 첫 깍두기.
오늘은 깍두기에 걸맞은 어떤 요리를 해볼지 곰곰이 고민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