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彼者 心安也』 열한 번째 글
회의가 시작되면 조용하던 공기가 달라진다. 누군가가 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하기 시작한다.
“제가 보기엔요—”로 시작된 그 말은 길고, 장황하고, 종종 결론이 없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도, 그는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요란하게 정리한다.
회의실 공기를 자신 중심으로 끌어가며 존재감을 확인하는 사람, 이른바 ‘발언왕’이다.
이런 사람은 어느 조직에나 있다. 보고 회의든, 전략 회의든,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말은 많지만 실행은 없다.
말의 목적이 문제 해결이 아니라 ‘존재 증명’이기 때문이다.
한 중견기업에서 있었던 일이다.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팀장 주관 회의가 열렸다.
항상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은 마케팅 파트의 과장이었다.
그의 발언은 대체로 이랬다.
“요즘 시장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특히 MZ세대의 소비 패턴이 변하고 있죠. 우리가 이런 흐름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합니다.”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문제는 그 말이 매주 똑같다는 거였다.
구체적인 실행안도 없고, 새로운 데이터도 없었다.
결국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회의는 늘 그의 장광설로 끝났고, 팀원들은 ‘오늘도 한 시간은 버렸다’며 자조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런 ‘발언왕’의 행동은 존재감 불안(existence anxiety)에서 비롯된다.
조직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약해지거나 역할이 불분명하다고 느낄 때, 사람은 말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나는 이 조직에 필요한 사람이다”라는 확신을 스스로에게 주기 위해 말을 늘리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잉 발언’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회의가 길어지고, 핵심이 흐려지고, 다른 구성원들의 의견은 묻힌다.
결국 말이 많을수록 신뢰는 줄어든다.
비슷한 사례가 공공기관에서도 있었다. 회의에서 항상 길게 발언하는 간부가 있었는데, 젊은 직원들의 표현에 따르면 “말의 80%는 상투적이고 20%는 자랑”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조직의 중심’이라 여겼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그의 의견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한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회의에서 그분이 말할 때면, 다들 메신저로 다른 얘기를 합니다. 그게 현실이에요.”
그렇다면 왜 이런 ‘발언왕’이 사라지지 않을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은 ‘침묵은 무능으로 보인다’고 믿는다. 그래서 침묵이 주는 불안함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진짜 리더, 진짜 전문가일수록 말보다 질문을 던진다.
말을 줄이고 맥을 짚는 사람이 결국 회의를 움직인다.
조직 내에서는 이런 ‘발언왕’을 대하는 방법도 필요하다.
첫째, 시간과 구조를 관리하라.
발언 시간을 명시하거나, 주제별로 정리된 회의 프레임을 두면 불필요한 장황함을 줄일 수 있다.
“이 안건은 3분 이내로 의견 주시죠.” 한 문장만으로도 회의의 효율이 달라진다.
둘째, 말보다 결과로 평가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누가 많이 말했다’가 아니라 ‘누가 실행했는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말의 무게보다 실행의 무게를 조직 문화로 만드는 것이다.
셋째, 회의의 목적을 명확히 하라.
보고가 목적이면 보고로 끝내고, 토론이 목적이면 토론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목적이 흐려지면 말 많은 사람이 중심을 차지한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인정은 말로 얻는 게 아니라, 말 뒤의 행동으로 얻는 것이다.
회의실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쉽지만, 신뢰를 얻는 건 다르다.
발언왕을 단순히 ‘귀찮은 사람’으로만 보지 말자.
그들의 장황함 뒤에는 불안이 숨어 있다.
자신이 조직에서 잊히지 않기 위해, 말로 존재를 증명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알면 화는 줄고, 회의는 조금 더 부드러워진다.
회의에서 진짜 필요한 건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핵심을 정확히 짚는 사람이다.
말의 양이 아니라 말의 깊이, 그것이 결국 조직을 움직이는 힘이다.
말이 많을수록 진심은 옅어진다.
그리고 묵묵히 일하는 사람은 결국 말보다 오래 기억된다.
- 멘토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