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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생각해보자' 말 속 숨은 의도

『知彼者 心安也』 스물 한번째 글

by 멘토K

회의실에서, 미팅 자리에서, 혹은 일상 대화 중에서도 자주 들리는 말이 있다.
“좋은 의견이네요. 한번 생각해보죠.”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이 말의 진짜 의미는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진심 어린 검토의 뜻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실상 “거절의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다.


한 중소기업 대표가 있었다.
그는 신제품을 개발하고 대형 유통사와 계약을 추진 중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담당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아이디어네요. 내부에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대표는 희망을 품었다. “곧 연락이 오겠지.”
하지만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결국 알게 된 건, 그 “생각해보겠다”는 말이 사실상 “우리는 안 하겠다”의 완곡한 표현이었다는 것.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생각해보자’라는 말을 들으면, 그 자리에 바로 결과가 보입니다.”

‘생각해보자’는 말은 사회생활의 윤활유이자, 때로는 관계의 방패다.
직설적으로 거절하면 상대가 상처받으니, 말을 돌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표현이 너무 자주, 너무 모호하게 쓰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의 말보다 그 말의 ‘맥락’을 읽는 힘이 필요하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표현을 ‘애매한 커뮤니케이션(ambiguous communication)’이라 부른다.
즉,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말하는 것이다.
‘좋다’도 아니고, ‘싫다’도 아닌 중간 어딘가.
이 말은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실제로는 책임을 회피하는 기능을 한다.


조직 안에서도 이런 표현은 흔하다.
“이 안은 괜찮은데, 조금 더 다듬어봅시다.”
“지금은 어렵지만, 다음에 기회가 있겠죠.”
“좋은 시도예요. 방향성은 나쁘지 않네요.”
이런 문장은 대부분 ‘지금은 아니다’를 의미한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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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명확하게 말하지 못할까?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관계의 파열을 두려워해서다.
“아니요, 이건 어렵습니다.”라는 말은 상대를 실망시킬 수 있다.
그래서 ‘생각해보자’라는 완충지대를 두어 감정을 지키려는 것이다.
한국처럼 체면 문화가 강한 사회에서는 이런 ‘말의 완충지대’가 오히려 미덕으로 여겨진다.


둘째, 판단의 책임을 뒤로 미루기 위해서다.
‘생각해보자’는 말을 하면, 당장은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즉, 결정을 ‘보류’함으로써 책임을 유예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리더십 부족의 전형적인 신호다.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결과에 대한 책임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심리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서다.
특히 협상이나 거래 상황에서 ‘생각해보자’는 말은 상대의 ‘절실함’을 테스트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즉, “진짜 하고 싶으면 네가 더 움직여봐라.”
이건 말이 아닌 권력의 언어다.


한 번은 컨설팅 현장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지방의 한 관광사업 관계자가 말했다.
“좋은 제안이네요. 저희가 내부적으로 좀 더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사업이 정해져 있었다.
그 말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상대의 기대를 관리하는 수단이었다.
즉, “당신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면서, 지금은 우리 선택이 아니다.”
그의 말은 부드럽지만, 그 속엔 분명한 의사결정이 숨어 있었다.


‘생각해보자’는 말은 듣는 사람의 기대에 따라 상처로도, 위안으로도 작용한다.
그래서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상대의 표정, 목소리 톤, 시선 방향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


만약 상대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면, 그건 80% 거절이다.
반대로 질문이 이어진다면, 그건 진짜 ‘검토 단계’다.
“혹시 일정은 어느 정도로 가능할까요?”
“비용 구조는 조금 더 조정할 수 있나요?”


이런 질문이 없다면, ‘생각해보자’는 말은 공손한 이별의 인사에 가깝다.

그렇다고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거절이구나’ 하고 체념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진짜로 시간이 필요한 결정도 있다.
사람은 감정적으로 “좋다” “싫다”를 판단해도, 머리로는 합리적인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안 후 바로 반응이 없더라도, 상대의 시간표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이제 내 차례가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정리될 시간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불필요한 불안이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보자’라는 말에 매번 기대를 품는 건 위험하다.
그 말은 사실상 행동의 주도권이 상대에게 넘어갔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럴 땐 이렇게 대응해야 한다.

“네, 그럼 언제쯤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이 질문 하나가 관계의 균형을 되돌린다.
그들은 더 이상 모호하게 빠져나갈 수 없다.
날짜를 지정하는 순간, ‘생각해보자’는 말이 실제 약속으로 전환된다.


또 하나의 방법은 요약 후 확인이다.
“정리하자면, 이번 제안은 방향성은 괜찮지만 예산이 변수라는 말씀이시죠?”
이렇게 말하면 상대는 자신의 말을 다시 객관화하게 된다.
결국, 애매한 말에 명확함을 부여하는 주도권이 당신에게 생긴다.


“知彼者 心安也.”


상대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말 속의 맥락과 심리를 이해하는 것.
그게 바로 관계에서 마음을 지키는 지혜다.
‘생각해보자’라는 말은 단순히 미루는 표현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감정적 부담을 줄이려는 자기 방어의 언어일 수 있다.


그 언어의 숨은 의도를 알면, 괜한 기대도, 불필요한 분노도 줄어든다.
그제야 우리는 상대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지 않고,
‘관계의 언어’를 읽는 눈을 갖게 된다.


결국 중요한 건 상대의 말이 아니라,
그 말 뒤에 있는 의도와 온도를 읽는 것이다.
그걸 알아차리는 순간, 내 마음은 더 단단해지고,
불확실한 관계 속에서도 한결 편안해진다.


- 멘토 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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