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사가 문주원 Jul 15. 2022

 베트남 쌀국수와 연어 롤


 아무리 좋아하던 음식이라 할지언정 단 한 번의 안 좋은 기억만으로 영영 싫어지는 경우가 있다. 십 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베트남 쌀국수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시기가 있었다. 외식할 기회만 있으면 베트남 음식 체인점으로 향했다. 잠을 자다가도 무의식적으로, ‘내일 또 먹으러 가야지’, ‘다른 브랜드의 음식점은 어떻게 맛이 다를까?’, ‘국물만 종이컵에 테이크 아웃은 안 되나?’, 등의 생각이 꼬리를 물 정도였다. [외식=베트남 쌀국수] 루틴을 충실히 지킨 어느 여름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심한 복통이 찾아왔다. 무더운 날씨였다. 쌀국수 숙주나물에서 쉰 냄새가 약간 났지만 심하지 않아 짙은 국물 향으로 지웠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다년간의 임상적인 경험을 통해 일반적인 장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고 응급실을 찾았다. "맹장염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지만 응급실을 비롯한 여러 병원의 오진으로 한 달 이상을 생으로 앓다 결국 수술했다.  베트남 쌀국수가 맹장염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베트남 쌀국수를 향한 열렬한 애정을 잃었다.  



 회는 잘 먹지 못하지만 연어 초밥과 롤은 좋아하던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기숙사로 엄마가 연락도 없이 연어롤을 사서 찾아왔다. 이미 저녁을 먹은 직후였기에 한 점을 집어 먹고 나머지를 해결할 방법을 고심했다. 기숙사 공용 냉장고는 학생들이 넣어두고 찾지 않아 서서히 상해 가는 음식들과 이미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음식쓰레기들이 가득했다. 한숨이 나오고 무척이나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냉장고 안을 부유하고 있을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공격을 잘 막아주길 바라며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를 랩으로 한 번 더 정성껏 봉했다. 그때는 무지했지만, 깨끗한 냉장고라 하더라도 회를 하루 이상 보관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한다. 결국 다음날 섭취한 연어 롤 두 조각에 두통과 구토로 만 이틀을 시달렸다. 그토록 좋아했던 연어 초밥과 연어 롤 또한 베트남 쌀국수와 함께 굿바이. 그전까지는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지만 미각이라는 건 철저히 감정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었다.   


살면서, 시간이 지나 서서히 흥미를 잃는 것들은 있었지만 꽤나 좋아했던 무언가가 한순간에 싫어졌던 적은 없었기에 이 두 경험은 이십 대 초반의 내게 무척 당황스러운 사건이었다. 한동안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을 잃었고, 몇 년이 지나고 난 뒤 아예 입도 못 대는 정도까진 아니고 식사 자리에 있으면 몇 입 먹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없음이 매우 아쉬웠다. 10여 년 전 두 사건을 겪고 나서, 나는 베트남 쌀국수뿐 아니라 태국 쌀국수의 세계에 진입했고 혀에 감미롭게 감기는 연어회와는 달리 아삭하게 씹히는 참치회의 질감도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트남 쌀국수와 연어를 향한 지난 애정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의 위안이 되었다. 지금도 태국 레스토랑을 더 선호하긴 하지만 가끔 베트남 쌀 국숫집에 혼자 들어가 식사를 하기도 하고 베트남 쌀국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한다. 참치회뿐 아니라 다른 회들과 초밥들도 골고루 즐기며 모둠 초밥에 나오는 연어 초밥도 흔쾌히 먹는다. 그러나 여전히 10년 전 그 기억 때문인지 본래 처음 즐기던 맛을 느끼지는 못한다. 의식하지 않더라도 몸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 지난 10년간 다양한 음식들을 충분히 즐겼지만, 먹기도 전에 몸이 약간의 거부감을 보이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나는 여전히 머리로는 베트남 쌀국수와 연어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지만 세상에는 처음처럼 회복되지 않는 식은 애정이 있다는 것을 그 음식들을 볼 때마다 씁쓸히 자각한다.  



한 순간의 사건으로 돌이킬 수 없는 애정의 상실은 음식뿐 아니라 모든 대상에게 해당될 것이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흔한 일일지도 모른다. ‘베트남 쌀국수’나 ‘연어 롤’은 ‘어떤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타이밍이 안 좋았거나 다른 환경 때문에 원래는 좋아하던 특정 사람이 고통스러운 순간을 떠올리는 리마인더가 되기도 한다. 내게 누군가가 그런 존재가 된다는 것도,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 된다는 것도 굉장히 슬픈 일일 테다. 많이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쌀국수나 연어 롤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던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몸이 긴장하는 것처럼.  



 흔히 사람에 대한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되고, 떠난 사람의 자리는 새로운 사람이 채운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사실, 특정 업무나 자격이 아닌 인격적인 관계에서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온전히 대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곁에 존재하던 누군가를 똑같이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점차 잊을 수는 있어도 절대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이나 좋지 않은 타이밍 때문에 오랫동안 좋아하던 누군가를 오해하거나 곡해해 싫어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모두에게, 앞으로 남은 날들을 살아가면서 무언가가, 누군가가 싫어지는 대신 더 많은 것이 새롭게 좋아지는 축복이 있기를.

이전 01화 엘리베이터, 그림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