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정체

by 작사가 문주원

중학생 때 일이다. 한밤중, 아파트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벽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쓱 지나갔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봐도 아무도 없었다. 분명 큰 그림자를 보았는데 그 실체가 보이지 않으니 더 무서웠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긴장을 놓지 못한 채 다시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을 때, 또다시 큰 그림자가 내 머리 위로 떠올랐다. 그림자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작은 나방이었다. 실제로는 아주 작은 존재였지만, 천장의 노란 불빛과 만나 본래 몸보다 수백 배는 커 보이는 되는 착시를 일으킨 것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쓱 지나가는 그림자를 종종 마주친다. 열에 아홉은 나방이다. 이제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처음 겪는 일인 양 매번 새롭게 놀라곤 한다. 다만 인생에 쌓인 빅데이터에 기반하여 그림자가 스치는 찰나, 나방일 것임을 빠르게 예측하고, 역시 나방이었음을 확인하여 평안을 찾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을 뿐이다.


두려움이 엄습할 때 객관적으로 불안과 공포의 원인을 짚어 보면 사실 별일이 아니다. 웬만하면 수습할 수 있고, 설령 해결되지 않더라도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두근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쉽지 않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나방의 그림자를 보고 놀란 마음을 금세 가라앉히듯, 두려움의 그림자가 내 영혼을 스칠 때 그를 몰아내는 속도에 점점 힘이 붙는다. 날 엄습하는 그림자는 실제보다 수백 배 혹은 수천 배 부풀려진 착시일 뿐이다. 지난 불안의 밤과 낮들을 복기해보면, 그 밤과 낮엔 언제나 끝이 있었다. 죽을 것 같아도 죽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통이 어느새 사그라드는 순간이 있음을 체득한 것이다.


산 근처로 이사를 왔더니 사계절이 나방의 계절이다. 어두운 밤, 내 귀갓길을 밝히는 조명이 있으니, 그들의 그림자도 춤을 추는 것이다. 어쩌면 때때로 내 삶에 드리우는 그림자는 내 삶을 비추는 빛 또한 여실히 존재한다는 역설적인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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