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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사가 문주원 Sep 17. 2023

해처럼 환하게 빛나진 못해도

 6살 무렵,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본 달이 무척 인상 깊은 장면으로 남아있다. 건물도, 신호등도, 사람들도, 멈춰있는 대상은 모두 자동차 뒤로 지나갔다. 그렇게 창 밖으로 보이는 많은 것들을 그 자리에 두고 떠나가고, 나란히 달리던 다른 차들도 행로를 달리하는데 오직 달만이 내가 탄 자동차의 속도에 맞춰 움직였다. 달리던 차가 신호에 멈춰 설 때마다 달도 그 자리에 멈춰 기다려주었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동행하는 달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 나는 신비로움과 든든함을 느꼈던 것 같다. 지금도 어두운 밤하늘에 뜬 달을 볼 때마다 마음이 일렁이다 이내 잔잔해진다.  


 내 이름에도 달이 뜬다. 문 씨라 영문명을 Moon으로 쓴다. 중고등학생 때는 사인을 할 때 n 오른편 위로 빼꼼히 나오도록 귀퉁이가 살짝 파인 달을 그려 넣었다. 외국에서 내 이름을 서류에 기입할 일이 있었는데, 접수를 받던 이가 '정말 네 패밀리 네임이 Moon이냐' 물었다. 괜히 뿌듯해진 나는 한국에는 문 씨가 있다고 답하며, 서툴지만 신나게 文의 의미를 이야기했다.  


 최근 작사 수업에서 수강생 한 분이 구글 클래스룸에 마지막 과제를 제출하며 가사 하나를 더 첨부했다. 제목은 <달 (Moon)>이었다. 나를 생각하며 쓴 가사라 했다. 가사를 읽는데 눈물이 핑 돌고 마음이 벅차서 바로 댓글을 달지 못하였다.  


 사촌 오빠가 부인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해처럼 밝아서 좋았다'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누군가의 '밝음'을 이야기할 때 지레 위축이 들곤 한다. 어린 시절, 어둡다는 말을 들었던 시기가 있어서일까. 동네 시장에 있던 치과 선생님을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적이 있었는데, 어린애가 얼굴이 너무 어두워서 차트에 기록을 해놨다고 나를 기억하셨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단체 사진을 찍던 날도, 사진사 분이 내 표정이 너무 딱딱하고 어둡다며 재촬영을 거듭했다. "거기 머리띠 한 학생 표정 때문에 한 번만 더 찍을게요" 아저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몇 번이나 한숨을 쉬셨고 내 원피스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밝은 표정을 지으라고 수차례 외치시고, 현장을 지켜보던 학부모들도 시범을 보였다. 가슴은 세차게 두근대고 현기증이 나는데 카메라 앞이니 움직이지도 못하고 몹시 괴로웠다. 나는 열심히 따라 했지만 결국 사진사 분이 만족하지 못한 채 촬영이 끝났다. 도대체 내 표정이 어떻길래 문제라는 것인가.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 사진에 담길 내 존재를 지워내고 싶었다.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교과서에 실린 사진 덕에 그 순간의 장면이 여전히 선명하다. 어떤 기억은 시간에 퇴색되어도 끝내 지워지지 않은 얼룩처럼 남는다. 그날 사촌 오빠의 말도 그렇게 내 지난날을 상기시켰다. 그런데 오빠는 뜻밖의 말을 덧붙였다.  


 "주원이는, 해처럼 밝은 건 아니지만, 달처럼 은은하게 주변을 비추는 그런 게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잔뜩 움츠렸던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을 자주 떠올릴수록 오랜 세월 주눅 들어있던 어리고 작은 마음이 자라났다. 내 마음에 자리 잡은 얼룩이 신경 쓰일 때 그 자리를 내려다보기보다 고개를 들어 은은하게 빛나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 빛을 고이 담아, 어두운 밤을 동행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비추고 싶다. 아무리 어두워 보여도, 그 사람 안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있다. 마다 타고난 광량은 다를지라도, 꺼지지 않는 빛이 있다. 미약한 빛이라도 당신과 나의 빛들이 모여 같은 곳을 가리킬 때, 우리가 함께 걷는 이 길이 아주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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