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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Mar 25. 2024

뭐 어때, 괜찮아

하얀 동백꽃이 피었다. 붉은색에 둘러싸여 유난히 더 하얘 보이는 꽃이었다. 학교 화단에 있는 큰 동백나무에는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붉은 꽃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활짝 핀 흰 꽃은 저만 색이 다른 것에 크게 위축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붉은색 동백꽃나무에 흰색 꽃이 필 수도 있는 건가. 의심 많은 나는 누가 꽃만 꺾어 가지에 얹어놓은 게 아닐까 싶어 손가락으로 살짝 꽃을 들어보았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꽃의 힘이 제법 세게 느껴졌다. 분명히 이 나무가 제집이 맞았다. 


흰 꽃의 이상함에 끌려 동백나무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옆에 있던 학생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왜 이 꽃이 여기 붙어 있는 건지 아무도 몰랐지만 다른 꽃과 다르다고 꽃을 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의 꽃도 흰 꽃에 영향을 받는 것 같진 않았다. 흰색과 붉은색이 더해져 연분홍빛이 나는 꽃이 없다는 게 그 증거였다. 꽃들은 그저 각자 생긴 그대로 내려오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동백나무가 만들어낸 분위기 덕분에 나만 계절과 맞지 않는 패딩을 입고 있는 상황도 크게 부끄럽지 않았다. 그래, 멋이 뭐가 중한디, 따뜻한 게 최고지.


꽃구경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발걸음을 돌려 산으로 향했다. 일 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가게 될 산을 학생들에게 서서히 구경시켜 주는 중이었다. 요즘 학생들은 산을 탄 경험이 거의 없다. 그래서 평지는 잘 걸어도 산은 힘들어한다. 매주 툴툴거리는 학생들의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시간에 맞춰 길을 떠났다. 산에는 보물이 있는 게 틀림없다. 책상 앞에서는 자동으로 축 처지는 학생들의 몸을 한 손가락으로 들어 올린 듯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볼 빨간 사춘기의 모습이 되어 가는 학생들을 보며 조금 전에 본 붉은 동백꽃을 떠올렸다. 각자 걸으며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산행을 끝내고 모두 학교 앞에서 국화빵을 파는 트럭 앞에 섰다. 그리고 "오늘은 내가 쏜다!"라고 말씀하신 예아트 뒤에 쪼르륵 서서 국화빵을 하나씩 건네받았다. 기분 좋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올해 일 년이 오늘만큼만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입생을 계속 추가 모집 중인 상황이라 신경이 많이 쓰이지만 적어도 우리끼리는 서로에게 편안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됐다. 아직 봄이 완전히 오지 않아 쓸쓸한 거지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자유학교에도 좀 더 많은 학생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꿀맛 같은 국화빵을 함께 먹으며 부담스럽지만 기꺼이 짊어지고 싶은 책임감을 느꼈다. 


"학교에 친구가 더 있으면 좋겠지?"

"아니요, 전 지금도 좋은데요."


하루닫기를 하며 내가 물은 질문에 서진이가 한 답이다. 나를 위해 한 말은 아니겠지만 그 한마디의 말이 지난 3주 동안 마음 졸이며 학생들을 보았던 교사들의 마음을 다 녹여주었다. 사실 나는 옆에 있는 학교에서 많은 학생이 우르르 나오는 모습이 부럽다. 올해 자유학교 학생들도 내 마음과 같을 거로 생각하고 한 질문이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학생이 적어도 괜찮은 학교라고 느껴서 다행이었다. 서진이의 답을 들으며 하얀색 동백꽃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의 부러움도 서진이의 답도 있는 그대로 두었다. 뭔가를 깨닫고 느끼고 반성하기보다는 그저 지금 우리들의 생각과 느낌에 집중하고 싶었다.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본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학생들은 모두 각자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학교생활이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건 우리가 모두 다른 색을 가지고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꽃과 다른 우리는 손발을 움직여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오가는 거리와 속도가 모두 달라 그 사이에서 오해와 이해가 생긴다. 때론 반갑고 때론 부담스럽다. 다들 오늘 함께 본 흰 꽃에서 적절한 거리를 배웠으려나. 꽃 대신 걸어야 할 산을 보고 한숨을 쉬었을지도 모르지. 아무렴 어떤가. 그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 그것으로 됐다. 올해도 이렇게 자유학교의 색이 만들어지고 있다. 무슨 색이 나오든 제 색깔을 스스로 존중하는 흰 꽃처럼 당당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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