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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Apr 01. 2024

시래기는 쓰레기가 아니쥐, 아암.

말린 시래기는 내 밀린 숙제였다. 오며 가며 현관문 옆에 둔 시래기를 볼 때마다 조만간 어떻게든 저걸 물에 담그리라 다짐했다. 내 집에 시래기가 오게 된 이유는 제철 채소를 사 먹어야 한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채소를 사려고 마트에 갔는데 생각보다 물가가 너무 비쌌다. 지난주 4천원 하던 미나리가 똑같은 모양으로 6천원 이름표를 달고 고이 쌓여 있었다. 아직 봄이 채 오지 않아서 그런 건가. 차마 범접할 수 없는 채소들 사이에서 몇 바퀴를 돌며 방황했다. 그러다 멈춰 선 곳이 말린 시래기 앞이었다. 이것은 어떻게 쓰는 건고. 어느새 가격표만 보던 내게 착한 가격의 야채가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낯설기 그지없었다. 


일단 샀다. 시래기 된장국을 먹어본 적은 있으니 요리법은 검색해 보면 되겠지 싶었다. 어디서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 나왔는지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아쉽게도 나의 호연지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집에 와 현관문 옆에 그 큰 덩치를 둔 후로는 존재감을 느끼지 않고는 출입이 불가능했다. 시래기와 눈이 마주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부담감이 증가했다.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편안해 보이는 요리사 선배님들이 쉽다며 말린 시래기를 물에 담가 삶고 보관하는 법까지 시범을 보여주셨다. 잘 보관하면 1년 동안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크게 어렵지는 않아 보여 안심은 했지만 무슨 낯가림이 야채한테도 있는 건지 나는 또다시 이유 없는 며칠을 더 보냈다.


주말이 되었다. 더는 부담스러운 현관을 오가기 싫어 시래기가 든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냄비에 물을 붓고 영상에서 본 대로 시래기를 담갔다. 잡내 제거에 필요한 밀가루가 없어 대신 부침가루를, 생강이 없어 생강가루를  넣고 시래기를 삶았다. 시간이 지나니 제법 시골에서 맡은 적이 있는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오호, 뭐가 제대로 되고 있는 모양이군. 뿌듯한 마음에 냄비 뚜껑을 수십 번도 넘게 열었다. 뻣뻣하던 시래기도 제법 오동통해졌다. 양이 많아 삶고 소분해서 냉동실에 보관하는 것까지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아직 먹을 반찬이 많아 시래기로 요리를 하진 않았지만 왠지 식사를 한 듯 배가 불렀다.


말린 시래기를 손질해서 반찬을 만드는 과정은 전혀 모르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저 싸서 샀고, 있어서 삶은 것뿐이었다. 아무리 내가 요리에 서툴다고 해도 삶고 손질하는 데만 3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다. 시래기를 삶으며 대책 없이 일을 벌이는 내가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 부엌 정리를 끝내고 쉬면서 삶은 시래기를 이용한 요리 영상도 찾아보았다. 시간은 선배님들보다 더 들겠지만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대책은 없지만 초보자가 가져야 할 열정은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따라 할 만한 요리 영상 몇 개를 골라 표시를 했다. 그리고 다음 주말에는 그중 하나를 따라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만들 시래기 된장찌개가 궁금해서인지 일주일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요일을 기념하며 드디어 시래기 된장찌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미리 꺼내 둔 시래기는 다 녹아서 적절하게 흐물거렸다. 나는 유튜브 요리사 선배님의 가르침대로 천천히 찌개를 끓였다. 쌀뜨물에 멸치 육수를 우려낸 후 시래기와 버섯, 양파와 두부를 넣고 된장을 풀어 한소끔 끓였다. 해보지 않은 음식이라 못했던 거지 막상 만들고 나니 별것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좋았다.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지레 겁먹고 하지 않는 것들이 시래기 된장찌개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제법 깊은 맛도 나는 찌개를 먹으며 내 안에 또 다른 두려움이 있다면 다 깨부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연히 성공한 찌개 하나에 허풍을 있는 대로 떨고 있었지만 나는 나의 의식의 흐름을 그냥 두었다. 누가 뭐라 해도 찌개는 맛있었고 주말은 편안했다.


착한 가격으로 시작된 시래기와의 인연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아직 내가 산 시래기는 냉동실에 10뭉치 정도 더 남았기 때문이다. 1년 동안 하나씩 꺼내 먹으며 모든 시래기가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는 계획 없이 사는 게 재미있다. 직장에서 일을 할 때는 실수하지 않도록 계획을 잡아 시작해야 하지만 사적인 시간까지 그렇게 살고 싶진 않다. 처음에는 당장 눈앞에 있는 길도 안 보이겠지만 큰일이 아니라면 시행착오를 겪으며 알아가면 그만이다. 더듬어서 길을 찾고 실패해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인생의 진짜 맛이라 생각한다. 내 삶에서 작게나마 도전하고 실패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감사하다. 오늘도 소소한 나만의 도전은 무사히 마무리됐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대문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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