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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Mar 29. 2024

20일간 버리고 버린 이야기

미니멀리즘

최근에 책을 읽다가 우연히 미니멀리즘을 알게 됐다. 꼭 필요한 물건만 두고 사는 사람들의 소박한 삶이 매력적이었다. 잠시 책을 덮고 집을 둘러보았다.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금세 보였다. 단순하게 살려면 일단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 먼저일 듯했다.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 인터넷을 찾아보니 잘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매일 꾸준히 버리는 프로젝트를 소개해주는 영상이 있었다. 잘 버린다는 건 뭘까. 환경 수업에서 학생들과 함께 답을 찾고 싶었던 질문이 영상에서 나오니 반가웠다. 머리로만 찾을 수 있는 답은 아니라서 일단 20일을 기간으로 잡고 수업 전 내가 먼저 해보기로 했다. 하루에 하나씩 버릴 물건을 늘려가며 버리거나 나눔을 하는 방법이었다. 20일째 되는 날에는 20개의 물건을 버려야 한다는 게 부담이 되긴 했지만 다시 집을 훑어보니 부끄럽게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나만의 20일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나는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 같았다. 틈만 나면 집 안 구석구석을 살펴 버릴 물건을 찾았다. 코딱지만 한 집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꽤 많은 물건들이 나왔다. 그리고 덜어낸 만큼 집이 넓어졌다. 하루는 큰마음먹고 창고를 열었다. 먼지 가득한 곳에 버리기 ‘요긴한’ 물건들이 잘도 숨어 있었다. 제일 먼저 깊숙이 있는 상자를 뺐다. 2011년도에서 17년도 사이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때도 나는 일기를 썼었구나. 반가운 마음에 일기장을 펼친 채로 그 자리에 그대로 퍼질러 앉았다. 여러 권의 일기장이 있었지만 다 채워진 것은 없었다. 다 쓰지 않은 공책을 두고 새 일기장을 마련해 다음 해의 일기를 적어 놓은 것을 보니 공책과 공책 사이에서 버리고 싶은 군더더기가 보였다.      


새해의 마음가짐을 꼭 새 공책에 적을 필요가 있었을까.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 쌓여 여유 공간 하나 없는 집을 만들어왔겠다 싶었다. 일기장 옆에 있던 편지와 사진 그리고 잡다한 물건들을 꺼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게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의 기준은 뭘까. 나는 물건을 정리하며 서서히 나만의 기준을 찾고 있었다. 물건들 사이사이로 과거 내 생각과 감정이 보였다. 묵혀둔 것들은 꺼내야 할까, 그냥 그대로 묵혀둬야 할까. 창고 앞에서 물건들을 정리하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오늘을 마지막으로 그때 만났던 사람들을 내 마음속에서도 보내주기로 했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물건을 정리하기가 한층 쉬웠다. 모르고 시작한 일이지만 지금 내가 하는 정리는 내 삶 속 여유 공간을 찾는 과정인 것 같았다. 지나간 추억은 잘 흘러 보내고 지금의 나에게 집중할 공간을 마련하는 중이었다. 


하루는 집에 있던 문구류를 정리했다. 양이 많아서 학교에서 공용으로 쓸 수 있게 기부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학생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던 공책도 나눠주고 20일간의 프로젝트 소개와 함께 환경 수업을 시작하면 될 듯했다. 수업에 대한 근거 있는 자신감이 올라왔다. 다음 날에는 옷걸이를 모두 정리했다. 분리배출도 되지 않는 품목이라 쓰레기봉투에 넣어야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냥 버리기엔 너무 새것이었다. 혹시나 싶어 집 근처에 있는 옷수선 집에 가서 사용하실 건지를 여쭈어보았더니 기분 좋게 받아주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 어깨가 자동으로 으쓱거렸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은 듯했다.


20일이 거의 끝나갈 때쯤 학교에서 동료 교사들과 환경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한살림에서 하는 '옷되살림' 프로젝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옷 상태는 괜찮은데 입지 않고 보관만 하는 옷들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그날 나는 퇴근 후 옷장을 정리해서 기부할 옷들을 골라냈다. 내가 하는 정리와 결이 비슷한 프로젝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힘이 났다. 그리고 이웃하는 학교 교사들에게 한살림에 보낼 만한 옷이 있다면 함께 실어 보내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옷을 보내겠다는 분도 계셨고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주는 분도 계셨다. 읽었을 뿐인데 나의 에너지가 안에서 밖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 덕분에 20일 동안, 쓰임이 다한 물건은 폐기하고 아직 쓸 만한 것은 새 주인을 찾아주는 작업을 무사히 마무리했다. 


혼자만의 프로젝트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주변 사람들의 호응과 먼저 시작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 삶, 내 물건, 내 기억에만 갇혀 살 때는 볼 수 없던 것들이었다. 물건을 잘 버린다는 건 그것을 필요로 하는 곳에 잘 두는 게 아닐까. 내가 받은 마음도 창고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다른 누군가에게로 돌려줘야 한다. 좋다고 혼자 움켜쥐고 있으면 먼지만 쌓일 테니 말이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적절하게 물건도 마음도 돌고 돌아야 한다. 나도 잘 순환하기 위해 20일간 배우고 받았던 것들을 환경 수업에 넣어볼 예정이다. 수업 시간에 보일 내 마음이 학생들을 통해 어디로 갈지는 나도 모른다. 그래도 일단 하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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