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나 Mar 22. 2024

돈 주고 쓰레기를 샀다

환경

저녁을 먹고 산책 삼아 쓰레기 분리배출도 하고 장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문을 닫으려고 잠시 뒤돌아 본 집은 쓰레기가 빠져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 보였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산책 후 마트를 둘러보며 제철 채소와 과일을 먹어야 한다는 욕심과 부담스러운 물가 사이에서 고민하다 한 번도 요리해 보지 않은 말린 시래기를 샀다. 장을 다 보고 나오려는데 마트 한쪽에서 갑자기 낙새(낙지새우볶음) 반값 세일을 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마트에 있던 사람 중 절반 정도가 한 곳에 줄을 섰다. 저 많은 사람이 줄을 설 정도로 맛있는 건가. 미어캣처럼 나도 한참을 기웃거리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후 슬쩍 가서 1인분을 샀다. 오늘따라 평소 산 적 없는 식재료를 과감하게 집어 들었다. 장바구니가 제법 묵직했다.


마트에서 돌아와 짐을 정리했다. 텅 비워진 곳간을 차곡차곡 채우며 내일은 뭘 해 먹을지를 고민했다. 마치 하루를 굶은 것처럼 식재료의 자태를 보는 것만으로 침샘이 움직였다. 정리를 다 끝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분 좋게 쉬고 있는데 문득 쓰레기가 가득 찬 바구니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산책하러 가기 전과 비슷한 정도의 양이었다. 누가 나보고 1시간 전에 쓰레기 치운다고 말만 하고 그대로 뒀다고 뭐라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장을 많이 본 것도 아니고 일주일 먹으려고 먹거리 조금 산 것뿐인데 내가 만들어낸 쓰레기가 저 정도였다. 양도 양이지만 다시 분리배출통을 채운 시간도 너무 짧았다. 속에서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일었다.


처음에는 죄책감의 끝에 억울한 느낌도 들었다. 쓰레기가 또 생기긴 했지만 나쁜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산 것은 딱 음식 반 쓰레기 반이 맞았다. 언젠가 현재 인간은 존재 자체가 범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땐 그냥 웃고 넘겼었는데 오늘은 그 말이 우습지 않았다. 내가 하루를 먹으려면 그만큼의 쓰레기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할 말이 없었다. 허탈해진 마음으로 샀던 물건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조금 전까지 고여 있던 침은 벌써 사라지고 되레 입이 바싹 말라 목이 탔다. 구석진 곳에 있는 시래기는 짐스럽게 느껴졌고 반값 세일에 넘어가 샀던 낙새도 괜히 매워 보였다. 새 학기가 시작됐으니 낙지 먹고 힘내려 한 거는 합리적인 소비라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반값 세일을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았다면, 사지 않았을 음식이었다.


4월부터 진행할 환경 수업 계획을 짜고 뿌듯한 마음으로 퇴근한 하루여서 조금 전 내가 새로 쌓은 쓰레기가 더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수업은 쓰레기 분리배출과 줍깅(쓰레기 줍기와 조깅을 합친 말)을 직접 하며 환경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한 생활 습관을 기르는 것이 목적이었다. 곰곰이 수업 계획을 되짚어보았다. 쓰레기 분리배출을 하는 게 환경 보호의 다는 아니었다. 줍깅을 체험하는 것도 말 그대로 일회성 행사에 가까웠다. 분리배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쓸데없는 구매를 줄이고 과대포장된 물건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오늘 내가 산 물건이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새롭게 쌓인 쓰레기를 보며 머릿속에 떠오른 이 질문이, 어쩌면 환경 수업을 일회성으로 끝나게 하지 않을 열쇠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일 수업 계획을 다시 수정하기로 했다. 질문의 답을 찾아보니 오늘 퇴근하며 느꼈던 뿌듯함이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내가 환경 수업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제일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있다. 예전보다 바깥 활동을 할 수 없는 날이 많아지는 세상이 두렵다. 정말로 존재 자체가 범죄일까. 숨만 쉬어도 입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어떻게 할 것인가. 숨을 안 쉴 순 없으니 난감한 일이다. 눈앞에 있는 물건들을 다시 살펴보았다내가 산 물건 중 낙새와 말린 시래기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작은 물건마저도 큰 박스에 들어 있는 대형마트에서 장을 볼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장을 보기 전에 미리 계획을 잡고 마트 대신 인근 시장에 가는 건 어떨까. 


좀 더 고민을 해서 학생들과 '잘 사고', '잘 쓰고', '잘 버리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사심을 가득 담긴 했지만 이제야 제대로 수업 방향을 잡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하다 보면 쓰레기를 돈 주고 사는 횟수를 조금은 줄일 수 있겠지. 환경 수업을 계획하며 요즘 날씨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내 기분이 변한다. 지구의 변덕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그 속에 사는 우리도 편안해질 텐데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어 무력해지기도 한다. 환경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개인보다는 국가나 기업과 같은 큰 규모의 단체가 맡아 진행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만 지금은 충분히 진행되는 것 같진 않다. 그래서 환경 문제를 잘 모르는 나도 해야 할 일이 생긴다. 뭐라도 하며 두려움을 잊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자연 앞에서 우리는 교사, 학생이 아니라 하나의 동료가 된다. 나에게 환경 수업은 정확하게 말하면 수업이 아니라 토론하는 시간이다. 오늘, 일주일, 한 달, 일 년 동안 내가 샀던 물건이 내게 꼭 필요한 것이었나. 그 물건이 남기는 잔여물은 어느 정도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앞으로 다가올 오늘, 일주일, 한 달, 일 년은 지금과  다르길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땐 급해서 그런 수업도 했었지' 하며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오늘 산 말린 시래기는 어찌할까. 내 몸에 들어오지 않으면 쓰레기가 될 테니 맛있게 넣을 수 있도록 궁리를 좀 해봐야겠다. 뭐니 뭐니 해도 제철 음식이 몸에 좋은 건 맞으니 말이다.


대문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이전 04화  그래도 하고 싶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