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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Mar 15. 2024

급성 잡생각 퇴치법

소나무야 소나무야

며칠 전, 창원 라디오 방송국에서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현재 한참 신입생 추가 모집 중이라 하나의 홍보 기회도 놓칠 수는 없었다. 1초의 고민도 없이 하겠다고 했다. 한시가 급한 학교 문제 앞에서 나의 내향성과 방송 출연이 전혀 없었던 과거 경력 따위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작가님께 질문지를 받고 바로 대본을 썼다. 그리고 틈만 나면 허공에 대고 연습을 했다. 뉴스 도중 생방송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오금이 지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시로 올라오는 두려움을 떨치고자 이번 일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틀 안에서만 지냈던 나를 깰 좋은 기회라 여기자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주어진 15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방송과 학교에 민폐를 끼치고 있는지 판단도 할 수 없이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다. 아나운서는 정해진 대본을 다 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내게 다음 질문을 건너뛰고 마지막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때 내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나운서의 노련한 의도를 알아챌 여유 따윈 없던 나는 건너뛴 질문으로 가지 못하고 다음 질문 앞에서 잠시 주춤거리다 그냥 입에서 나오는 말을 했다. 그 뒤는 아예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게 방송은 끝났다. 학교를 나오면서부터 '잘했을 거야, 아니야, 망했어'가 머릿속에서 서로 싸웠다. 두 생각이 1초에 한 번씩 나를 밀고 당겼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쓸쓸한 가~~~~을 날에도, 눈보라 치~~~~는 날에도.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하지 않는 네 빛."


차를 빼서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계속 소나무를 불렀다. 조금의 틈새라도 보이면 잡생각 두 마리가 바로 치고 들어올 것이 뻔했다. 나는 멈춤이 고장 난 라디오 같았다. 처음보다는 두 번째가, 두 번째보다는 세 번째 소나무가 더 컸다. 그런다고 지나간 시간이 변하진 않겠지만, 30분 전의 나를 지금의 내가 어떻게 소화해 장기기억에 옮길 것인지는 현재의 일이었다. 소나무를 애타게 찾는 내 쉰 목소리는 소화액이었다. 소나무는 왜 변하지 않는 걸까. 변할 수 있는 여지라도 남겨두지. 그럼 덜 쓸쓸하고 덜 추울 텐데. 괜히 죄없는 소나무만 달달 볶으며 말도 안 되는 생각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 와중에도 울음 대신 웃음이 나와 다행이었다. 노래가 너무 짧아 반복해서 부르기 지겹다고 툴툴거리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노래 부르는 걸 멈추진 않았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모두 꺼내 밥을 먹었다. 크게 입맛이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밥을 더 많이 펐다. 든든하게 먹고 나니 그제야 한숨이 나왔다. 조금 진정된 나를 보며 역시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순식간에 텅 빈 그곳으로 퇴근 전 했던 전화 통화 기억이 들어왔다. 아, 밥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구나. 좀 더 진정시킬 뭔가가 필요했다. 일단 집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쓰레기 분리배출 할 것과 장바구니를 챙겨 바로 집을 나왔다. 걸으며 또다시 소나무를 찾았다. 진정되지 않는 나를 안아주고 싶은데 나는 나를 안을 수 없어 소나무를 붙잡나 보다 했다. 


산책하며 습관적으로 인근 마트에 들어갔다. 뚜렷이 살 것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두워진 밤거리보다는 안전하면서도 볼거리가 있어 방황하기 좋은 장소였다. 몇 바퀴를 돌면서 커다란 무를 발견했다. 오늘 내 방황의 마무리는 이것으로 하면 되겠다 싶었다. 작은 아기를 안듯 소중히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 늦었지만 그때부터 무생채를 만들기 시작했다. 채를 썰며 잡생각도 잘게 잘게 썰었다. 양이 제법 되어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얗던 무가 빨갛게 물들고 새콤달콤해지면서 힘이 잔뜩 들어 있던 내 몸도 조금 느슨해졌다. 완성된 무생채를 통에 담으며 이만큼 애썼으면 됐다 싶었다. 이래도 잡생각이 올라온다면 그건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었다. 


모든 걸 정리하고 자기 위해 불을 껐다. 엿가락처럼 길고 긴 하루였다. 움직인 만큼 결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은 푹 잘 권리가 있었다. 잡생각도 그건 인정하는지 더는 나를 괴롭히진 않았다. 여전히 그 순간이 기억나진 않지만 잘했을 거라고 내 마음대로 결론을 내고 눈을 감았다. 몸이 축 처졌다. 오늘 처음 느끼는 편안함이었다. 내 마음은 내 것이 맞을까. 오늘처럼 마음을 잡기 힘든 하루를 보내고 나면 늘 드는 생각이다. 내 것이 내 것이 아니라면 그럼 누구의 것일까. 오늘 못 찾은 답은 내일 찾을 수 있을까. 아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만이 답일지도 모르겠다.


대문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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