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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Apr 05. 2024

네~에, 그게 정상입니다.

"저기, 혹시 오늘 주으신 카드 있나요? 제가 카드를 꽂아놓고 온 것 같아서요." 

"네~에, 매일 20개에서 30개씩 줍습니다."

"아! 그래요? "

"네~에, 오시면 99.9%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다행입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 제가 가끔 깜빡하네요."

"네~에, 괜찮습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주유소에 전화를 하며 몇 번을 웃었는지 모른다. 아저씨의 구수한 입담은 체크카드가 없어 당황했던 내 마음을 순식간에 사그라들게 했다. 99.9%라는 숫자는 내가 카드를 잃어버릴 경우보다 찾을 확률이 더 많다는 뜻이었다. 한바탕 웃고 난 후 주유소로 달려가며 무의식적으로 그래도 혹시나 0.1%의 시간이 다가올 수도 있음을 대비했다. 그리고 주유소에 도착할 때쯤 나는 거의 아저씨와 비슷하게 평온해져 있었다. 설사 카드가 없더라도 이젠 괜찮을 듯했다.


표정 없는 아저씨는 나를 보시더니 수북이 쌓여 있는 카드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중 내 것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익숙한 카드 하나가 한눈에 들어왔다.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웃고, 카드 찾고, 고맙다고 인사하느라 여러 갈래로 바빴다. 통화 한 번의 마력이 이렇게도 큰 것인지 몰랐다. 아저씨가 내 카드만큼 반갑고 고마웠다. 급히 나오느라 음료수 하나 못 사 온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매번 오는 셀프주유소였으므로 다음에 갈 때는 작은 과자라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능청스러운 "네~에" 소리가 장난치듯 귓가를 맴돌았다. 상대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받아주면서도 아무 일 없는 듯한 편안함은 내가 가장 가지고 싶은 힘이다. 그 주유소에서 카드를 잃어버리고 당황한 사람이 내가 처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아저씨는 카드가 없어 갈 길 잃은 어린양들의 전화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받을지도 모른다. 통화를 하며 사람들도 나처럼 무심한 듯한 아저씨의 목소리를 통해 안심을 하지 않을까. 만약 아저씨가 당황한 내 마음을 공감하고 위로해 주었다면 친절은 느꼈겠지만 불안이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내 앞에 닥친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알려주는 역할을 아저씨가 해주셨다고 생각한다.


아저씨는 카드를 잃어버린 나를 보고 정상이라 하셨다. 실수를 하거나 맡은 역할을 못해낼 때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나는 아저씨의 괜찮다는 말씀이 낯설었다. 그래서 통화 내용을 몇 번 곱씹어 보았더니 말속에 뜨끈한 뭔가가 보였다. 야무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이 많아 주유를 하면서도 그 생각을 했구나 하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갑자기 온몸에 잔뜩 들어있던 힘이 빠지며 노곤해졌다. 그제야 주중에서 주말로 넘어간 느낌이었다. 그래, 오늘은 뭐든 해도 괜찮은 토요일 오후구나. 오전에는 편하게 깜빡했으니 이제 나도 봄 구경 좀 해 볼까.


잃어버린 카드를 찾는 길은 예상외로 유쾌하고 따뜻했다. 괜찮다는 아저씨의 말을 내 마음대로 해석한 후 그것을 다시 나에게 해보았다. 괜히 웃음이 나는 걸 보니 나에게 제법 잘 먹히는 말 같았다. 완벽하게 잘하고 싶은 욕심에 어깨 무겁게 퇴근하는 날이면 아저씨의 "네~에" 소리를 내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불안이 무겁다는 건 내 착각이었다. 되레 주유소 아저씨와의 전화 한 통이면 소리 없이 사라질 정도로 가벼웠다. 늘 한 치 앞만 보고 버거워하는 내게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살펴보라고 주유소 아저씨가 나타나신 것 아닐까. 할 일 많은 세상이다. 가끔 깜빡하는 나를 편하게 봐주며 심각함은 좀 덜어내야겠다. 그래, 그게 정상이다.


대문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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