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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버린다는 건 뭘까

에필로그 : 1일 1버릴리스트

by 마나

법정 스님은 매일 하나씩 버리며 살라고 하셨다. 에고, 스님. 애써 가진 건데 굳이 또 버릴 건 뭔가요... 다 버리고 나면 끝엔 뭐가 남죠? 매일 버리며 살 만큼 가진 것도 없는데요...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말씀이 잊히지 않아 나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버려야 하는지에 대한 꼬리 질문을 만들어 줄줄이 세웠다. 바쁘니 그냥 넘어가자고 스스로 생각을 다독여 보기도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스님 목소리는 내 안에서 더 선명하게 들렸다. 스님은 분명 내가 깨치지 못한 뭔가를 담아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사는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하잖는가. 답을 찾고 싶은 나는 꼬리 질문들을 징검다리 삼아 한 발자국씩 스님에게 다가가 보기로 했다.


일단 매일 하나씩 버리는 삶을 시작했다. 집안을 뒤져 버릴 물건을 찾았다. 처음에는 쉬웠다. 쓸모없는 물건들이 많아 크게 생각하지 않아도 버릴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단계를 넘어서자 버릴지 더 보관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애매한 물건들이 보였다. 쓸모는 없지만 혼자 의미를 부여해서 보관하고 있는 것들도 문제였다. 물건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시간이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 일의 속도가 더뎌져 지루하게 느껴졌다. 버텨야 하는 시간이었다. 다행히 지루한 시간도 흐르긴 마찬가지다. 포기하지 않고 버틴 덕분에 나는 적어도 1년 이내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건은 버린다는 기준을 세울 수 있게 됐다. 이렇게 내 생각을 만들어가는 거구나. 그 후 버리는 일은 한층 수월해졌다. 작업 속도도 빨라졌고 물건이 정리된 만큼 내 공간도 늘어났다. 한 단계를 건널 때마다 자신감이 붙었다.


물건처럼 머릿속도 정리가 가능할까. 눈에 보이지 않아 난감하긴 했지만 어려워 보이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쉬워질 거란 믿음이 생겼다. 우선 지금 하고 있는 잡생각을 종이에 적었다.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후회와 자책이 먼저 떠올랐다. 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 여러 번 배워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었다. 종이가 순식간에 채워졌다. 메모를 다시 읽으며 내가 고민해서 고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분류했다. 그리고 후자 쪽은 선을 그어 없애 버렸다. 생각보다 남은 고민들이 많지 않았다. 메모지를 보니 순간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흩어졌던 잡생각은 이내 다시 나에게 몰려들었다. 매일 후회와 자책을 할 때마다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생각은 하루에도 수만 가지가 떠오르고 명확히 만져지는 것도 아니라서 물건을 정리할 때와는 달리 깔끔하게 해결되진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매일 버릴 것을 또다시 만들며 살고 있었다. 끝없는 길 앞에서 깊은 한숨이 나왔다.


스님은 생각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을 수양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평생 수양을 하며 사는 종교인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분들의 삶은 결과나 목표가 아니라 수양하는 과정 자체에 있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나라고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조바심을 버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평생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마음먹었다. 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만큼 마음의 여유도 늘어나 있겠지. 사실, 어설프긴 하지만 생각을 비우고 단순해지려고 노력하는 지금 이 시간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스스로 아끼려는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외부에 대한 걱정을 버리는 만큼 내가 보였다. 버려야 쌓이는 시간도 계단처럼 단계별로 올 것이다. 이제 과정을 알겠으니 천천히 가자고 마음먹었다.


말 습관은 생각 습관만큼 버리기가 어려웠다. 내가 가진 교사 직업병 중 하나는 충고나 조언을 하는 것이다. 매일 말하고 매일 후회한다. 며칠 전에는 학생과 이야기하며 내 말이 쓸데없는 조언이라는 사실을 말을 하는 도중에 깨닫기도 했다. 누구나 자신만의 성격과 사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내 기준으로 남을 재단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쓸데없는 잡생각도 줄일 수 있고 나로 인해 타인이 기분 상하는 일도 줄어들 수 있을 텐데. 분명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들어주는 법은 배웠는데 그것을 실제 내 말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내 안의 무엇이 구린내 나는 말 습관을 붙잡고 있는 걸까. 버리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그나마 버리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 다행이다. 매일 버릴 수 있을 만큼 가진 게 많지 않다던 내 말이 얼마나 건방진 것이었는지 알 듯했다.


물건 앞에서는 욕심이 생기고, 잡생각은 제대로 방향을 잡기 어렵고 말은 예민해서 조심스럽다. 잘 버린다는 건 뭘까. 정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일단 시작점은 내게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데서가 아닐까. 매일 하나씩 버려보니 버릴 것이 없던 날은 하루도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도 책장 앞에서 팔 책을 찾아 서성거렸다. 그리고 한 달 전,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팔지 않았던 책 몇 권을 빼냈다. 책이 빠져나간 자리를 보자 묵혀 있던 숙제가 사라진 듯 속이 시원했다. 언젠가 거의 빈 책장을 볼 수 있을까. 그곳엔 무슨 책이 남아 있게 될까. 여전히 답을 찾고 싶은 질문이 많다. 그래서 어려워도 계속 버려볼 생각이다. 경력이 쌓이면 그만큼 인생도 깔끔해질 것이다. 나는 단순해지고 싶다. 그리고 그 마음의 이유도 들어다 보고 싶다. 멀리 생각 말고 일단 오늘만 생각하자. 하루에 하나씩 버리며 앞으로 나는 어디로 가게 될지 살펴보면 될 일이다.


대문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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