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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Apr 26. 2024

몽당연필을 깎으며

내 책상에는 연필 일곱 자루가 있다. 정신없다는 핑계로 연필 하나를 제대로 다 쓰지도 않고 새 연필을 마구 꺼내 쓴 지난 세월의 흔적이다. 며칠 전 책상 정리를 하며 여기저기 숨어 있던 연필을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필기를 해야 할 때 언제든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손질을 해놓기로 했다. 연필은 쓰는 맛도 있지만 깎는 맛도 있다. 천천히 커터칼로 하나씩 깎으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저마다의 소리가 달랐다. 점점 짧아지는 연필을 보니 왠지 모를 뿌듯함도 느꼈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없어진 길이만큼 내가 공부를 했다고 생각해서일 거다. 올해 안에 일곱 개 중 몇 개를 몽당연필로 만들 수 있을까. 제대로 물건 하나를 다 쓰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매일 조금씩 연필심을 눌러쓰며 연필 길이에 따라 나도 변하길 바랐다. 공부하라고 하면 책상 정리하고 계획표 짜는 데 시간을 다 보냈던 학창 시절처럼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연필을 가지런히 두는 데 최선을 다했다.


연필은 쓰는 만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당장 어제와 오늘의 모양이 다르다. 길이도 달라지고 깎은 모양대로 머리 스타일도 매번 변한다. 조금만 쓰다 보면 금세 끝이 뭉툭해져 글씨의 두께도 획마다 다양해진다. 날카로움이 사라진 연필을 가지고 공책 한 바닥을 깔끔하게 채우는 건 힘들다. 좀 더 깨끗한 필기를 위해서는 중간에 커터칼을 한 번 더 들어야 한다. 번거롭긴 하지만 되도록 연필깎이를 사용하진 않는다. 내 손을 거쳐 연필이 변하는 과정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연필은 아날로그 감성을 가진 나를 대신해 주는 물건 같다. 그래서 기계보다는 손으로 연필을 다듬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짧은 순간이지만 연필 깎을 때만큼은 정성을 다한다. 샤프로 가득 찬 세상에 아직 연필이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연필을 쓸 때는 깎을 때보다는 그의 존재를 잘 의식하지 않는다. 그의 본래 이유는 글을 쓸 때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연필 대신 글의 내용에 집중한다. 연필과 종이가 부딪치는 소리는 글쓰기 시간마다 나오는 배경음악이다. 커터칼과 부딪치는 사각거림과는 또 다른 소리다. 나는 그것을 글 잘 쓰라는 내용의 응원가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글쓰기는 혼자 하는 작업이지만 늘 연필과 함께다. 사각거리는 소리 사이로 스스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정말로 연필이 줄어든 길이만큼 내 눈의 깊이도 깊어지고 있는 걸까. 


오늘은 제일 작은 연필을 들었다. 신문지로 만든 연필은 깎을 때마다 인쇄된 글씨의 흔적이 보였다. 신문 용지 자체가 회색이긴 하지만 내 손때가 더해져 연필은 더 진한 회색이 되어 있었다. 오전 수업을 하며 연필을 쓰고 교실 책상에 그대로 두고 나왔다. 나도 모르고 있다가 한참 뒤에 연필을 찾아 교실에 다시 들어갔는데 연필은 나 외에는 다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괜히 미안해 연필을 주워 먼지 묻은 곳이 없는지 살폈다. 뒤에 붙어 있는 지우개도 거의 다 썼고 길이도 잡기 힘들 정도로 짧았지만, 나에게는 세상 어떤 것보다 긴 연필이었다. 


일곱 개 중 하나는 동그란 모양의 오렌지색 연필이다. 연필 끝에 '잘 놀아야 잘 큰다'라는 말이 적혀 있다. 나는 오늘 잘 놀고 있나. 조용한 교무실에서 두 시간째 컴퓨터만 보고 있으니 아직은 크게 재미있는 날 같진 않다. 제길, 오늘은 잘 못 크겠네. 괜히 연필을 보며 툴툴거리다 잠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이 다 간 건 아니니 지금부터라도 재미있는 걸 찾아보자 싶었다. 오렌지색 연필을 들고 해야 할 일을 왼손으로 적었다. 오른손보다 속도는 떨어지지만, 손맛이 더 느껴져 괜히 쓸데없는 말도 덧붙였다. 10분 뒤 '해야 할 일' 목록이 완성되었다. 일이지만 왼손과 연필 덕분에 조금은 장난스럽게 시작할 수 있어 마음이 가벼워졌다. 잘 크기 위해서라도 일을 놀이처럼 놀이를 일처럼 하자 싶었다.


사각사각


나는 매일 글을 쓰고 연필을 깎는다. 필기도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후로 다른 사람들 손에 든 것들도 예사로 보지 않는다. 무심한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채, 머리를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연필처럼 나도 그들도 각자 해야 할 일을 해나가고 있는 중이겠지. 학교에서는 일하면서 퇴근 후에는 글을 쓰면서 연필과 함께한다. 가끔 외롭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건 옆에 있는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살짝 까먹기 때문일 것이다. 연필과 함께 하는 내 삶이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세련됨 대신 울퉁불퉁하지만 묵직한 모습이 나와 더 잘 맞다. 그래서 오늘도 샤프 대신 연필을 사용한다. 내 손 안에서 연필이 연필다울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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