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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Apr 19. 2024

시장 구경

일탈이 만든 일상

구경 한 번 와보세요.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고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매일 점심시간이 되면 나는 옛날 노래 '화개장터'를 흥얼거리며 인근 시장을 간다. 바쁜 학교에서 잠시나마 탈출할 수 있는 안성맞춤의 장소다. 학교만 나오면 바로 시장이 보일 정도로 가깝고 규모도 작아 금세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다. 10분의 일탈을 좇아 어제도 학교를 나왔다. 시장을 걸으며 상인들의 바쁜 손놀림을 봤다. 조금 전까지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던 속도와 비슷했다. 어슬렁거리며 걷는 내 발걸음이 그들의 움직임과 대비되어 더 느려 보였다. 일부러 상점과 좀 더 떨어져 걸었다.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는 서로에게 어느 정도 무심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나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 그들의 바쁨이 나를 편안하게 했다. 미안하게도 남의 일터는 나의 쉼터였다.

                

시장 초입에는 두부를 파는 두 가게가 마주 보고 있었다. 처음 시장에 갔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한 가게에 들어가 두부를 샀다. 국산 콩으로 만든 손두부는 마트에서 파는 두부와는 차원이 다른 고소함이 있었다. 계속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두부를 사기 위해 다시 그곳으로 갔다. 옆 가게에 대한 호기심이 들기도 했지만, 의리상 왠지 한 번 간 곳에 계속 들어가야 할 듯했다. 그렇게 나는 반자발적으로 한쪽 가게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두부는 만족스러운데 갈 때마다 옆 가게에 괜히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손님이 가지게 되는 부담이 이 정도인데 두 가게 주인의 불편함은 어떨지 궁금했다. 같은 종류의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붙어 있으면 여러모로 신경이 많이 쓰이지 않을까 싶었다.           

     

시장을 자세히 살펴보니 두부 가게뿐만 아니라 과일, 채소, 떡, 반찬 가게 할 것 없이 두세 곳이 각각 붙어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내가 쉴 수 있는 건 모르는 게 많은 이방인이기 때문이었다. 크게 죄를 짓는 게 아니라면 십 분의 산책 중에는 무심하고 이기적이고 싶었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오롯이 혼자였다. 손에 든 두부에서 따뜻한 온기가 나왔다. 촉감이 좋아 조심스럽게 두부를 조몰락거렸다. 그리고 어릴 적 친구들과 소꿉놀이하던 그때처럼 잠시 일 생각, 사람 생각은 접고 시장 구경에만 집중했다. 조금씩 내 배터리가 충전되었다.

                

시장 끝에 있는 채소 가게 상인들은 봄나물의 흙을 털어내고 먹기 좋게 다듬고 있었다.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이름은 모르는 나물들이 많았다. 내가 반찬으로 만들 수 있는 나물이 뭐가 있을까. 가게 앞에 서서 뭘 사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하다가 미나리 한 묶음을 샀다. 에코백에 두부의 온기와 미나리 향이 가득 찼다. 아직 먹지도 않고 보기만 했을 뿐인데 그저 든든했다. 학교로 되돌아오며 나도 모르게 '화개장터' 콧노래가 다시 나왔다. 시장은 노랫말처럼 있을 건 다 있는 곳이었다. 10분 전후로 목소리 볼륨이 다른 걸 보니 충전 시간도 그 정도면 충분한 듯했다. 기분 좋게 쉼터를 나와 다시 일터로 들어갔다.      

     

일하다 보면 일상이 무겁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가끔은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시장을 산책하며 내 걱정의 실제 무게는 체감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0분 만에 사라질 정도의 무게인데 과대 포장되어 내게 오는 이유는 뭘까. 혹시 학교 안에서만 학교를 보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시장을 걸었지만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학교를 중앙에 두고 멀찍이 한 바퀴 돈 것이었다. 시장에서 본 학교는 말랑말랑한 두부 모양이었다. 왼쪽에서 보면 일터 같고 오른쪽에서 보면 쉼터 같았다.


집에 돌아와 미나리를 손질했다. 이물질도 제거하고 여러 번 헹궜다. 그리고 바로 요리를 할 게 아니라서 미나리를 물에 담가 마르지 않게 두었다. 시장 구경을 하며 나도 모르게 이것저것 배운 게 있는 모양이다. 상인들이 채소에 물을 뿌리던 장면이 떠올라 따라 한 것이었는데 다음 날에도 미나리가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을 보니 뿌듯했다. 오늘은 시장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매일 조금씩 다른 채소와 과일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멀리 거리를 두고 학교를 보며 걷는 시간이 야릇하기도 하다. 오늘도 나만의 쉼터를 숨겨두고 출근한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시장 가듯 학교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대문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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