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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일1선택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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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May 08. 2024

끝장 본 날

 1일 1선택

공책 한 권을 끝장냈다. A4용지 크기에 120장 속지가 들어 있는 필사 공책은 내 손때가 탈 만큼 타서 새 것일 때보다 더 두꺼워 보였다. 물건 하나를 쓰임에 맞게 다 쓰고 나면 그 자체만으로 상징가치가 생기는 듯하다. 어린 왕자의 장미꽃 한 송이처럼 나에게도 이 공책은 문구점에 있는 흔하디흔한 공책과는 달랐다. 마지막 장에 필사를 하고 손으로 공책을 쓰다듬었다. 지난 8개월 동안 나와 함께한 역사가 느껴졌다.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조금씩 변하는 필체도 살폈다. 시간이 지나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나도 모르게 변해가는 내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천천히 공책 구경을 한 후 책장에 꽂았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지만 필사하며 원 없이 본 것이라 미련이나 아쉬움은 없었다. 


학창 시절부터 셀 수 없이 많은 공책을 사용했었다. 특히 새 학년이 되면 과목마다 새 공책을 사서 첫 장에 깔끔하게 필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공책의 끝장을 본 기억은 거의 없다. 성인이 되어서도 매년 초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서 쓰다 말았다. 시작은 거창하되 마무리가 안 되는 상황이 쓰다 만 공책만큼 쌓였다. 제 버릇 개 못 준다 해서 나도 평생 이럴 줄 알았는데 우연히 필사를 하며 습관을 고쳤다. 처음 필사 공책을 다 채웠을 때,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 며칠 동안 공책을 보고 또 보았다. 완성하고 마무리하는 것이 시작할 때만큼이나 설레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이번이 4번째 필사 공책이었다. 지난 2년간 몇 권의 책이 내 필체로 재탄생됐다. 필사를 그만둘 생각은 없으니 앞으로도 계속 여러 공책이 채워질 것이다. 요즘 쓸데없는 물건은 정리하고 간단하게 살고 싶어 다시 읽지 않을 책은 팔거나 기부를 하는 중이다. 아직은 책 욕심을 다 버리지 못해 책장에 책이 많이 꽂혀 있지만 점점 책 대신 공책으로 진짜 내 책장을 만들어 보고 싶다. 공책 속에는 내가 느리게 읽고 싶어 선택한 책이 들어 있다. 책 선정부터 꽤 많은 시간이 든다. 한 번 선택한 책은 최소한 몇 개월에서, 많으면 거의 1년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느리게 만들어질 내 책장이 벌써 기대된다. 그 속은 분명 나와 닮은 부분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여태 필사한 책마다 마지막 날의 느낌이 달랐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끝냈을 때는 더는 필사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쉬웠고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주기적으로 다시 읽을 책이라고 느껴 서운함이 덜 했다. 요즘은 친구가 쓴 책 <Lightening Their Fires>를 필사 중인데 교사로서 학생들과 있었던 일을 풀어낸 글이라 친구와 이야기하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책이 끝나고 나면 아마도 매일 보던 말동무가 없어진 것처럼 허전할 것이다. 책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공책의 마지막도 의미가 있다. 손때가 가득 찬 공책은 책과 함께했던 시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매일 아침 필사 시작 전, 공책에 그날의 날짜와 시간을 적었다. 그리고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와 함께 혼자서 흥겨운 리듬을 탔다. 시간이 지나며 공책은 리듬감 제대로 살린 책으로 변했다. 다 쓴 공책을 보며 언젠가 다시 이 책을 읽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도 습관대로 날짜를 적지 않을까 싶다. 공책에 내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며 익어간다. 그만큼 나도 성숙하고 있는 거라 믿는다.

다 쓴 공책(왼) & 새 공책(오)

다음 공책으로 학교에서 만든 노트를 선택했다. 화려하지 않고 군더더기가 없는 표지가 좋았다. 뭐든 처음은 좀 낯선가 보다. 새 공책을 쓴 첫날에는 낯선 사람 앞에서 긴장하듯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공책 크기가 이전 것에 비해 작아 자동으로 글씨 크기도 따라갔다. 평소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렸지만 새롭게 쓰는 맛이 있었다. 공책에 따라 내 필사도 변하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글씨는 그날의 내 심리까지 담아냈다. 처음의 딱딱하고 정리된 글씨체는 시간이 지나고 공책에 익숙해지면서 서서히 편안하고 유연하게 변할 것이다. 그때까지 공책, 책, 연필, 지우개, 그리고 내 감정까지 모두가 합을 맞춰 내 필사가 무사히 항해 할 수 있길 빈다. 


공책 한 권을 다 썼다. 남들 눈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일상의 작은 성취감들이 내 자존감의 열쇠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이번 일은 충분히 자랑할 만한 가치가 있다. 앞으로 나는 몇 권의 공책을 더 만들게 될까. 그리고 내가 만든 책으로 가득찬 책장에서 나의 어떤 모습을 찾게 될까. 필사를 하며 서서히 나를 알아간다. 한 자씩 갈 수밖에 없는 길을 공책이 제공한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한 번만 한 사람은 없을 길이다. 나는 이번이 네 번째였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새로운 길을 시작한다. 천천히 내 속도에 맞게 가 보자. 새 공책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대문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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