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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May 17. 2024

사는 게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내 상상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았었나.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학생이 한 명이었다. 아무리 여행 바로 다음 날이라 해도 이런 교실까진 상상하지 못했다. 눈앞에 닥친 현실 앞에서 내 동공이 있는 대로 흔들렸다. 당장 오늘 오전, 영어 수업을 준비한 대로 해도 될까. 지난주 영어 공부하기 싫다는 이유로 나를 깊은 고뇌에 빠뜨렸던 학생이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해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시 돋친 눈빛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두 시간 연속 영어 수업. 온전히 즐기고 싶은 그 시간은 어느덧 견뎌야 하는 순간으로 변해 있었다. 아침열기를 하면서도 나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 했다. 예상 밖의 일에 부딪혔을 때가 뭔가를 선택해야 할 시간이다. 아침열기가 끝나고 수업 시간까지 15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수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우왕좌왕하다가 5분을 썼다. 예전에 재미있게 했던 수업 학습지도 급하게 몇 개 골랐다. 그래도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갈 곳 없이 떠도는 마음을 제자리에 두지 못하면 오늘 수업은 학생들이 아니라 내가 망칠 것 같았다. 잠시 멈춰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일단 수업을 잘하고 싶다는 욕심부터 버리기로 했다. 두 시간 중 한 시간 정도라도 영어를 가르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자고 마음먹었다. 남은 한 시간은 학생과 함께 산책하며 영어를 싫어하는 이유라도 실컷 들어보고 싶었다.


수업 시간 5분 전이었다. 조용히 교무실 문이 열리며 학생 한 명이 꾸벅 인사를 했다. "왔다!"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학생 두 명. 갑자기 속에서 다시 힘이 샘솟는 느낌을 받았다. 참을 수 없는 이 가벼움을 어떻게 소화시켜야 할까. 웃기면서도 슬픈 현실이었다. 나는 지각한 학생의 뒷모습을 고향에 돌아온 개선장군의 것인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수업 시간이 거의 다 됐다. 장군님을 믿고, 손에 든 세 종류의 수업 학습지를 좀 더 편하게 움켜쥐며 교실로 들어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열기를 하며 당황했던 마음은 제법 차분해져 있었다. 교실 문 쪽으로 걸어가며 학생 수가 적어서 수업이 더 잘 될 수도 있을 거란 주문도 걸었다. 학생 없는 학교에서 교사 혼자 난리 치는 중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문을 열었다.


교실 안은 오늘따라 유난히 넓어 보였다. 서로 거의 말을 하지 않는 두 학생은 내외하듯 떨어질 수 있을 만큼 떨어져 있었다. 큰 공간을 2시간 동안 혼자서 메워야 한다는 난감함에 저절로 침을 꼴딱 삼켰다. 적막한 교실은 내 목구멍소리까지 생생하게 드러냈다. "하하하" 나는 허공에 대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어색하지만 수업을 시작한다는 나름의 표시였다. 그리고 급하게 준비한 두 가지 종류의 수업과 원래 하기로 계획했던 수업을 차례대로 소개하며 각자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해 보라 했다. 다행히도 두 학생의 선택은 같았다. 영어 실력 차이가 크게 나서 두 학생을 한 번에 만족시킬 수업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학습지를 나눠주고 번갈아 가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교에서의 일 대 일 수업은 나도 학생들도 낯설긴 마찬가지였지만 고맙게도 잘 따라와 주었다. 학생들 입에서 나오는 영어 소리가 외로운 교사의 마음을 잠시나마 채워주었다.


오전 영어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학교는 종일 조용했다. 하교할 때까지 두 명의 학생들에게서 들리는 소리는 거의 없었다. 학교에 학생이 없는 방학 중에 느껴지곤 하던 외로움이 올해는 시간을 잘못 맞췄는지 학기 중에 몰려왔다. 학교가 조용해질수록 반대로 교사 회의 시간은 늘었다. 최근에는 늘 축 처진 채로 시작해서 할 수 있을 만큼은 해보자로 끝났다.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걸 보면 교사들의 기억력이 금붕어 수준이거나 현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일 게다. 학생들의 출결 습관을 바꿀 수 있는 기똥찬 비법 같은 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질문하고 답하기를 계속 이어갔다. "그래서 어쩌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하다가 뜬금없는 동료의 말에 어이없어 웃었다. 답 없는 길 앞에서 실없는 농담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살리는 응급처치법이기도 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더니 진짜 그렇다. 오늘 나는 텅 빈 교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썼다. 평소에 조용한 장소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너무 많이 생각했나 보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내가 계속 징징거리니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중 한 분이 '옜다. 실컷 먹어봐라'라는 의미로 오늘을 내게 던져 주신 건 아닐까 싶다. 이제는 그만 툴툴거리고 조용하면 조용한 대로 시끄러우면 시끄러운 대로 받아들이며 살아야겠다. 퇴근 후, 아까워서 못 먹고 있던 큰 망고 하나를 깎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달콤하고 시원한 맛이 속으로 들어왔다. 휴,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누가 만든 말인지 모르지만 내일은 또 다른 해가 뜬다 했다. 오늘 힘들었으니 내일 걱정은 내일 하고 저녁 때만이라도 교사 간판은 좀 내려야겠다. 아직 5월이다. 갈 길 머니 지금은 좀 쉬자.


* 대문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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