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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ine 육은주 Oct 20. 2023

왜 의령인가

한국 자본주의 태동의 요람,

의령읍에 들어서면 첫 인상이 산천이 수려하고 풍요로운 여유와 격이 느껴지는 고장이라는 것이다. 의령에 들어서면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수량은 풍부한 남강과 우선 맞닥뜨린다. 남강 그 한가운데에 작은 다리가 있고, 다리 위에서 보면 강 중간에 나무들도 몇 그루 자랄만큼 제법 큰 너른 바위가 존재감있게 자리잡고 있다. 이 바위가 바로 유명한 솥바위이다. 이 바위는 중국 고전에 나오는 발이 셋달린 솥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솥의 발이 난 방향으로 주변에서 한 나라를 먹여 살릴 큰 부자, 또는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기는 인물이 반드시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설은 예언인듯 현실이 되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LG (창업당시는 금성) 창업자 구인회 회장, 효성 창업주 조흥제 회장, GS 허만정 회장, 삼영 이종환  회장이 이 고장 출신이다. 이회장, 구회장 조회장 등은 나이도 비슷한 동년배여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주의 지수초등학교에서 동문수학했다. 현재 초등학교에는 이들이 이 학교 출신임을 나타내는 자랑스런 푯말이 붙어 있으나 현재는 폐교 위기를 맞고 있는 조그만 시골학교이다.     

솥바위를 한가운데 중심으로 두고 행정구역상으로 정확히 보자면 의령과 함안 진주를 아우르는 이 지역은 의령에서 삼성,함 안에서 효성, 진주에서 LG가 태동했다. 각각 솥바위 중심으로 삼성, GS,삼영이 동남, 효성이 북쪽,  LG가 서쪽이라고 한다. 행정구역상 이름이 달라 멀어보이지만 실은 한 초등학교를 다닐 정도로 이 고장들은 가까이 인접해 있다. 의령의 삼성 이병철 생가는 그대로 잘 보존되어 관람객들에게 개방되어 있을 뿐 삼성 가문이 살고 있지는 않은데, 진주의 LG가는 여전히 가문이 살고 있는듯, 인기척이 있었다. 생가 규모와 주변 가옥 규모로만 보면 LG구씨 가문의 규모가 훨씬 커보였고, LG가는 구씨 집성촌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삼성 이병철과 금성의 구인회는 만석꾼의 자손으로 당시 최상층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을 거쳐 이병철은 인근 마산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며 사업을 시작했고, 구인회 회장은 진주에서 포목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의령 박물관의 관계자 설명에 따르면 의령은 '전해 내려오는 인본의 고장, 나라의 충성, 충의의 고장, 경제를 이룩한 부자의 고장으로 기가 좋고, '택리지'에 따르면 "조선땅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 15곳 중의 하나"로  지형지물이 좋고, 경상남도에 흐르는 낙동강과 남강 두 강을 끼고 있다. 

주변산들이 노적봉 형상이고, 강 두 개가 만나기 떄문에 교역이 활발, 비옥한 땅에 농사 잘되니 공부도 잘 하는 선비들과 인물들이 태어난 게 아닌가 했다. 의령은 한지를 최초로 생산했을 정도로 한지의 질이 좋고, 닥나무 특산으로 제지업이 활성화되어 지방에 부가 축적되었다. 장날이면 의령 주변 개들도 지폐를 물고 다녔다 할 정도로 2017년 신현세 제지장, 무형문화재 한지장인으로 지정되었다.      

또 의병의 최초 시효의 고장이 의령으로 곽재우 장군 생가 외  백산 안제 선생 생가  등 독립운동가들의 생가도 여럿 남아 있는 '인물의 고장'이라고 했다.    

김상철 관장에 따르면, 60,70대 어르신들께 듣기를 법조인은 전주지역, 경제인은 서부 경남지역에서 많이 배출되었지만, 현재는 낙후되어 있는 지역, 자수성가 지역으로 당시 지역을 버리고 큰 도시로 나갔다고들 한다.

이런 지리적, 사회경제적 배경 외에 사상적 배경으로는 남명 조식 선생의 '의 (義)철학'을 들 수 있다.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 선생 외손서( 손녀 사위) 로 이황이 영남좌파로 형이상학과 토론을 즐겨하였다면, 남명 조식은 영남 우파로 불리며 의를 중시하고 호연지기,  실천적 의(義) 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영남 좌우는 현대의 좌파 우파 개념이 아니라 영남을 가르는 강을 중심으로 왼쪽 지방이냐 오른쪽 지방이냐로 가른다고 한다. 초반에 예로 든 곽재우 장군은 남명 조식의 직계 제자로 문과 무를 겸비하며 유학의 사회참여적인 적극적 행동지성을 보여준 인물인 것이다.  

남명 사상은 보다 실천적 사상으로 광해군때 북인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실각한 후 그 맥이 끊기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진주 경상대학교에 남명학 연구소가 설립되어 나고야 성 박물관과 교류하는 등 그의 사상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김 관장은 이 고장에서 탄생한 재계 인물들이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유로 지방색이  유림세력이 강해 장사라 천시, 무시하는 시선이 있어서 였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리 하여 마산, 부산 등 선비들의 기반이 없고, 일본인들의 개항 이후 발전하게 된 인근의 다른 고장으로 갔다는 것이다.. 

 

의령을 돌아본 결과, 왜 서부 영남에서 걸출한 기업들이 태동하고 기업가 정신이 무르익었는가하는 물음에 필자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첫째, 삼국시대 이전 가야로 거슬러 가는 오랜 기반의 탄탄한 경제력이 있었다. 수려한 자연을 낀 곡창지대로 천석꾼 만석꾼이 어렵지 않은 부농들이 많았고, 제지산업을 바탕으로 경제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둘째, 왜와의 인적 교류가 멀게는 가야시대로부터 중세에는 임란 전후에도 이어져왔고, 일제 강점기는 물론, 일본이 근대에 들어 산업화 선진화되자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셋째 가장 중요하다고 보이나 간과되어 온, 퇴계사상, 성과 경이라는 실천철학, 남명 조식의 의 철학의 바탕을 들 수 있다. 퇴계 선생의 실천적 철학의 바탕위에 남명 조식의 칼찬 선비의 의(義)정신이 합쳐져 이 근방 선비들의 정신세계에 알게 모르게 내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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