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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다 Feb 10. 2024

나이 듦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게 갑자기 마음의 스위치가 꺼졌다. 여행의 둘째 날 갑작스레 찾아온 우울의 감정에 어리둥절해졌다. 책을 읽어도 유독 슬픈 내용만 마음에 내리 꽂혀서 울컥함에 속이 답답했다. 도대체 왜 슬픈 걸까 그 생각만 하다가 여행의 시간이 끝났다. 아쉬움과 슬픔이 뒤섞인 채로 떠났던 곳으로 돌아왔다. 직장에 출근하는 다음 날 여행의 피로인지 마음의 피로 때문인지 몹시 지쳐 있었다. 그냥 그러려니 견뎌야지라고 생각하던 직장이 갑자기 다시 목을 죄어오는 것 같았다. 난 이곳이 정말 싫어. 난 이곳에 필요한 존재도 아니야. 그런데 왜 떠나지 못하는 걸까? 그렇지만 날 필요로 하는 다른 장소란 게 존재하긴 하는 걸까. 그동안 애써 잘 봉합해 두었던 감정들이 계속 새어 나왔다.

 엄마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지난번 전화로 다툰 뒤로 한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집에 있는 김치를 좀 나눠준다고 했다. 역에서 아빠를 만났다. 아빠는 이상하게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는 오래된 외투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더 빠지고 하얗게 세어있었다. 얼마 못 본 새 아빠는 더 늙고 쪼글쪼글해져 있었다. 왠지 키가 작아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김치를 건네받으며 과일을 건넸다. 아빠는 주머니에서 꼬질꼬질한 낡은 봉투를 꺼내더니 생일이었으니까 엄마가 전해주라고 했다며 건넸다. 봉투에는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이 들어있었다. 돌아가는 아빠의 뒷모습은 작고 작았고 나는 서글픔과 슬픔에 잠겼다.

 밤이 되면 알 수 없는 슬픔에 잠식되어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몹시 피곤했다. 연휴가 코앞인데도 기쁘지가 않고 무덤덤한 기분이 이상했다. 침대에 가만히 모로 누워서 인형을 끌어안았다. 책에 집중하고 싶은데 눈이 뻑뻑하고 무거워서 더 읽기가 힘들었다. 고요함이 싫어서 배경음처럼 유튜브를 틀어 놓았다. 파도가 치는 소리, 비가 내리는 소리,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 그런 것들을 들었다. 갑자기 슬퍼지고 눈물이 나고 그러는 건 나이가 들어서인 거야 생각했다. 모든 게 나이가 들어가서인 거면 좋겠다고. 더 더 시간이 흐르고 더 나이가 들면 지금의 감정도 흐릿해질 것이고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이다. 지금의 알 수 없는 슬픔도 죄책감도 후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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