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아버지의 가장 끔찍하고 우울한 삶은 '일본의 작은 집에서 아주 드세기로 유명한 미국 여자와 반항적인 자식과 함께 맛없기로 소문난 영국의 음식을 먹으면서 팍팍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식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합니다. 우스갯소리 같기는 하지만 가시가 돋아있는 말이라 마음이 아프군요.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인 윌리 로먼은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자식들과 부모, 그리고 아내를 비롯한 가정을 지켜야 하는 책임감과 의무감에 짓눌려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외판원으로 일하다 새로운 사장에게서 파면당하게 됩니다. 그날 밤 자식들에게 보험금을 남겨놓으려 자동차를 타고 나가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는 자기가 죽으면 많은 사람이 장례식에 올 것이라고 했지만 그의 장례식은 너무나 초라하고 쓸쓸했습니다. 그의 아내 린다는 "당신이 올 거라고 했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 있나요? 오늘 우리 집의 마지막 할부금을 갚았는데…… 빚도 다 갚았는데…… 그런데 이제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라고 울부짖습니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좋은 날>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 로먼이 죽는 장면에서 저는 우리나라의 소설인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인력거꾼 김 첨지는 아내가 아파서 나가지 말라고 했으나 뿌리치고 나가서 일합니다. 그날따라 운수 좋게 손님이 많아 돈을 많이 벌고 아내를 위해 설렁탕을 사서 들고 돌아왔으나 이미 아내는 죽고 말았으니……. 윌리 로먼은 승진을 기대하고 갔으나 강제로 회사에서 쫓겨나고 죽고 맙니다. 김첨지 아내의 죽음과 윌리 로먼의 죽음. 이런 걸 우리는 반전(反轉)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순재 손숙 주연의 연극 <세일즈멘의 죽음>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 윌리 로먼처럼 집을 장만하기 위한 할부금을 갚기 위해서, 자식들 학비를 대기 위해서, 자식들 취업을 시키기 위해서, 자식들 결혼시키기 위해서, 자동차를 사기 위해서, 더 좋은 집과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더 맛있는 것을 먹이기 위해서, 더 좋은 옷을 입히기 위해서 쉼 없이 달리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네 아버지는 ‘할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세상의 아버지로 살다 보면 잠시라도 아플 권한이나 시간조차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잠시의 휴식이나 여유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아프면 어떻게 하지? 애들은 누가 키우지? 누가 돈을 벌어 가정을 꾸려나가지? 부모님은 누가 보살펴주나?' 이런 이유로 자신은 절대로 아프면 안 되는 그런 아버지들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살기 팍팍한 나라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항상 힘들고 외롭고 슬픈 존재입니다.
가지고 있던 꿈은 다 잃어버리고 윌리 로먼처럼 할부금을 갚기 위해 살아가는 할부 인생이 우리와 같은 아버지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강인한 체하지만, 속으로는 나약한 인간들의 모습이 우리 아버지들의 인생이 아닌가 합니다. 아파서 쉬고 싶어도 아플 수 없고, 외로움과 쓸쓸함을 보이는 것조차도 사치스럽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들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지고 쓸쓸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입니다.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영화 <세일즈맨의 죽음>
저도 그런 아버지로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뇌종양 수술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뇌종양 수술을 받기에 앞서 전조증상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길을 걸으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둥둥 떠다니는 듯했고, 아침마다 화장실로 달려가 노란 위액까지 다 토해내면서도 한참 동안 병원에 갈 수 없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내가 잘못되면 나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식들과 아내와 부모님은 어떻게 될까? 내가 정말로 잘못되면 우리 가족은 누가 지켜주지?', '윌리 로먼처럼 보험금이라도 남겨주기 위해 자살을 할까?' 그런 생각에 병원에 갈 수 없었습니다. 저도 절대 아프면 안 되는 이유를 가진 아버지였으니까 말이지요.
그러나 수술 후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내가 지금껏 쉼 없이 살아온 인생이 행복이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건강을 잃으면 아무 쓸모도 없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윌리 로먼처럼 죽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나머지 가족도 다 불행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힌디어로 ‘존재하는 것은 선(善)과 동의어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악(惡)과 같은 뜻’이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선이라고 했습니다. 선을 추구하는 것은 곧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살아있는 게 선(善)이며 행복입니다.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축복받고 충분히 희망적이고 아름다우며 행복한 것입니다.
모리스 마테를링크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인간은 본래 행복해지기 위해, 건강하기 위해 세상에 나온 존재입니다.” 새겨들을 만한 말입니다. 이제 윌리 로먼과 같은 축 처진 어깨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쓸쓸하고 외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더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아버지가 있다면 행복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있는 행복을 느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차!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건너뛰고 넘어갈 뻔했습니다. 윌리 로먼이 회사를 그만두고 돌아오던 날 그는 마당에 홍당무를 심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왜 홍당무를 심었을까요? 책에서는 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추측하건대 그것은 ‘희망’ 일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면서 희망이라는 두 글자는 때로는 꿈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양분이 되기도 합니다. 윌리 로먼의 할부 인생은 절망과 실패로 끝을 맺지만, 작가인 아서 밀러는 살아가면서 절대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홍당무를 통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태양이 작열(灼熱)하는 사막 한가운데서도 오아시스를 찾듯이, 한겨울 얼음장 아래에서도 물고기가 숨 쉬고 살아가듯이, 매운 눈보라 속에서도 복수초가 피어나듯이, 겨울 추위에서 오히려 꿋꿋하게 자라나는 푸른 보리처럼, 절망 속에서도 윌리 로먼의 홍당무처럼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