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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배 Sep 27. 2022

미스킴라일락

첫사랑의 씁쓰레하고 순박한 향기

세상에서 가장 쓴 풀이 무엇일까요? 소태나무일까요? 소가 잎을 뜯어먹다가 너무 써서 ‘퉤’ 하고 뱉을 정도로 쓰다고 해서 소태나무란 이름을 가졌다고도 하고, 소의 쓸개처럼 쓰다고 붙인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 식생활 곳곳에서 ‘소태 같다’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말로 쓰기는 쓴가 봅니다. 너무 짜거나 쓴맛이 날 때 소금 소태니, 소태맛이니 하는 말을 사용합니다. 어린 시절 기억으로 어머니가 동생의 젖을 뗄 데 소태나무 잎을 으깨서 살짝 발라놓았더니 다시는 젖을 물지 않았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입에 쓴 것은 병에 이롭다는 말이 있듯이 소태도 몸에 이롭다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우리 동네 꽃은 소태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쓴맛을 내는 꽃나무를 소개하고자 합입니다. 바로 제가 맛본 가장 쓴맛을 가진 꽃나무는 독자 여러분이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 꽃나무는 바로 라일락입니다. 여러분은 라일락의 화려한 꽃과 향기에 취해 ‘설마 그럴 리가?’ 하고 의문이 들 것입니다.     

라일락


라일락의 꽃말은 ‘첫사랑’ 혹은 ‘젊은 날의 추억’이라고 합니다. 필자는 젊은 날에는 친구들, 나이 들어서는 가까운 젊은이들에게 하트 모양으로 생긴 라일락 잎으로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첫사랑의 맛을 알게 해 주겠다고 라일락 이파리를 하나 따서 어금니로 꼭 씹어보라고 권합니다. 저도 예전에 당해본 적이 있어서 그 맛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쓴맛이 다 있다니!’ 나는 바로 화장실로 가서 토하고 수십 번 입을 헹구고 나와서도 쓴맛이 가시지 않아 캑캑거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친구들과 젊은이들에게 ‘바로 첫사랑의 맛은 라일락 잎처럼 쓰다네.’라고 알려주곤 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도 한 번 장난으로 해보시기를 권합니다. 다만 먼저 장난을 하시기 전에 스스로 먼저 맛을 보신 후에라야 합니다.     

하트 모양의 라일락 이파리


라일락 이파리의 쓴맛을 보면 삶을 살아가면서 맞이하는 첫사랑의 쓴맛, 인생의 쓴맛을 옅게 해 줘 추억을 끌어안고 고통을 이겨가면서 살아갈 힘을 줄 것입니다.     


첫사랑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소설이 있지요. 맞습니다. 여러분이 추측하셨다시피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입니다. 16살 ‘블라디미르’와 예쁘고 신비하고 다정스럽기만 한 21살 ‘지나이다’의 첫사랑의 슬픈 기억을 그린 작품이지요. 우리 젊은 날 첫사랑은 피해갈 수 없는 의 열병이어서 검고 앞이 캄캄한 어두운 터널처럼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치명적이고 쓰디쓴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사랑의 행복한 기억은 언제나 가슴에 쌓인 독이 되어 나이가 들어도 잊지 못하고, 느닷없이 불쑥 어디선가 튀어나와 마음을 뒤집어놓고 아련히 사라져가는 그리움이 되기도 하고 참기 어려운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바윗덩어리처럼 버거운 기억으로 남아서 끝까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첫사랑은 늘 그리움의 대상으로만 남아서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떠나지 않습니다. 혼자서 마음속으로만 좋아했던 애달픈 사랑이지만 죽을 때까지 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추억이면서 쓰디쓴 독이 되었습니다. 투르게네프는 <첫사랑>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첫사랑의 의미를 우리에게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반 투르게네프(출처 : 나무위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블라지미르의 아버지가 뇌일혈로 죽기 전 블라지미르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사랑의 비극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사랑을 조심하여라. 그 행복을, 그 독을 두려워하거라.” 맞습니다. 투르게네프가 말한 것처럼 첫사랑은 라일락 잎처럼 평생 지워지지 않는 쓰디쓴 독입니다.     


저는 라일락 중에서도 미스킴라일락을 좋아합니다. 꽃도 일반 라일락보다 화려하지 않고 약간은 수줍은 듯이 작게 피고, 향기도 라일락만큼 너무 진하지 않고 씁쓰레합니다. 미군정 시절 어느 미국 장교가 북한산에서 자라고 있는 털개회나무 씨앗을 가져다가 개량하여, 한국에서 근무할 때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타자수 여직원의 성을 따서 ‘미스킴라일락’이라고 등록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 라일락꽃의 향기에 대해 잘 표현한 시 한 편이 있습니다. 도종환의 <라일락꽃>이라는 시입니다. 특히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꽃의 의미를 천착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도종환 시인이 느낀 ‘연보라 여린 빛’과 ‘창백하게 순한 얼굴’을 미스킴라일락에서 보았습니다.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 도종환, <라일락꽃> 전문  

        


미스킴라일락의 매혹적인 향기에 사랑을 가득 담아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눈으로 느낄 수 있는 미스킴라일락의 향기를 더듬으며 씁쓰레한 첫사랑의 추억을 되짚어 봅니다. 아마도 공원 귀퉁이 단 두 그루밖에 없는 저 미스킴라일락꽃이 지면 제 마음은 너무나 허전하여 방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꽃이 지면 여름이 가고 향기가 사라지듯 제 젊은 날 첫사랑의 기억은 점점 사라져만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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