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Pioneer, 개척자

by 참읽기
Pioneer
옛날 프랑스어에 pionnier라는 말이 있었는데, 보병, 즉 길을 걸어서 전투에 나아가는 군인을 의미했대.

옛날에는 지금처럼 길이 닦여있지 않아서 새로운 곳을 가려면 걸어갈 수 있게 직접 길을 만들어야 했지. 그래서 지금도 보이는 길이든 보이지 않는 길이든, 뚜벅뚜벅 걸어가며 없는 길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pioneer라고 해.


내가 요즈음 제일 자주 하는 일이 뭔 줄 알아? 배를 내려다보고 표면에 올록볼록 올라오는 너의 몸짓을 감상는 거야. 여기가 발인가, 저기가 팔꿈치인가 짐작해 가면서. 달에 착륙한 우주인처럼 내 손은 네가 들어있는 배를 탐험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웃고 쓰다듬고 바라보다 배가 차가워질까 봐 급히 덮어. 네가 기특해서 가슴이 뿌듯해. 이 마음을 꼭 기억하고 싶어. 네가 움직이는 것만으로 매일매일 감탄했었다는 걸.


두 달 후 너를 만나고 나면 처음에는 움직이는 게 기특하다가 당연해질 거야. 조금 지나면 그것을 넘어서 단계별로 '잘' 움직여주기를 바랄 테지. 또 말하기를 기대하며 약간의 옹알이를 기특해하다가, 말하면 기뻐하다가, 그것이 당연해지면서 '잘' 말하기를 바랄 거고. 물론 성장은 귀해. 부모니까 자녀의 성장을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지. 하지만 엄마는 오늘 배 표면에 보이는 너의 몸짓 하나만으로 감격하는 이 마음을 계속 오래 간직하고 싶어.


잠자는 방법도 새로 배워야 했어. 요즘은 소파에서 잠을 자. 침대에서는 거의 못 자거든. 배를 누르지 않으려면 옆으로 누워야 하는데, 침대에서 베개로 성을 쌓아도 자꾸 몸이 기울어져. 소파를 재발견했지. 소파에 누우면 등받이가 자동으로 나를 받쳐줘. 밤새 이리저리 기우뚱거리지 않아도 매우 안락하게 잘 수 있어. 처음에는 소파에서 자다가 3시에 침대로 복귀했는데, 그 시간이 점점 늦어져서 며칠 전엔 늦은 아침까지 소파에서 깊게 잠들어버렸어. 단점도 있어. 거실이 쌀쌀해서 목이 칼칼하고, 코가 막혀. 뱃속에 소우주가 자라고 있는데 완벽한 수면을 기대하는 건 사치인지도 모르겠어.


먹는 것도 완전히 달라졌어. 당뇨, 고혈압은 평생 나하고 관계없는 일인 줄 알았거든. 워낙에 혈압은 낮아 안전범위에 있는데 혈당이 문제가 됐어. 임신성 당뇨. 첫 검사에서 경고가 나왔어. 빵과 과일을 먹으면 안 된대. 검색 끝에 통밀빵은 괜찮다는 걸 알았어. 다행히 동네에서 100% 통밀빵을 파는 가게를 찾아 한 봉지를 샀지.


다만 빵이 시었어. 문득 옛 기억이 떠오르더라.


스물에 떠난 가난한 배낭여행에서 친구들과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 독일에서 프라하에 가야 했어. 배곯지 않겠다며 가게에서 제일 큰 빵을 골랐어. 세상에 그렇게 큰 빵은 처음 봤어. 이틀은 먹겠다며 좋아했는데 기차에서 열어보고는 경악했지. 전골냄비만 한 빵은 돌처럼 딱딱했고 식초처럼 시큼했어. 누구도 이빨을 댈 수 없었지. 결국 야간열차를 타는 밤에 누가 우리 칸에 다가오면 이 빵을 가면으로 쓰고 위협하자고 했어. 이 빵은 냄새나고 험상궂으니까 모두가 싫어할 거라고. 우리는 오래도록 그 빵을 가면빵이라 불렀어. 그때 그 빵, 100% 통밀빵이었나 봐.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들어섰어. 너를 위한 물건을 하나둘씩 준비하는 일. 육아용품을 숙지하는 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야. 필요한 물건도 많고, 한 가지 물품을 만드는 회사도 수십 개야. 어느 회사의 어떤 제품이 좋은지까지 알고 선택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어.


친한 언니동생들과의 모임에 리스트를 들고나갔어. 모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지. 그녀들은 리스트를 한눈에 파악하고 물품별로 필요, 나중에 필요, 필요 없음, 물려줄 품목들을 기입했. 내가 만들고도 정리 안 되던 리스트였는데 어떻게 척척 알아보는지 신기어.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다음이었어. 녀들은 물품별로 어떤 회사의 어떤 제품이 어떤 면에서 좋다 나쁘다를 평했어. 이런저런 점을 들어서 추천했어. 인터넷에서 봤던 생소한 브랜드명들을 자연스럽게 말하고 평가까지 내리다니. 블랙홀을 지나 다른 행성에 도달한 사람들 같아 보였어. 도달 정도가 아니라, 기지를 세우고 이미 밭을 일궜어. 다들 대단해 보여.


너를 만나는 날을 상상해. 다들 겪는 일이라고, 힘들지만 또 겪을 만큼 기쁜 일이라고 해. 알아. 머리는 알아. 아직 몸이 몰라서 좀 무서워. 임신과 출산이 처음이라 아직 엄마의 인생에는 그 길이 없어서 그래.


하지만 길이 없다고 못 가는 건 아니지. 다들 만들면서 갔으니 엄마도 그렇게 해봐야겠어. 우리 둘 다 처음이잖아. 엄마가 용기 내서 가보면 너도 용기 내서 잘 오겠지.



[사진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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