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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Feb 02. 2024

중쇄는 못 찍었지만 100만 부는 팔고 싶어

Trust_ 메시지 _1. 비전(방향성)

이나는 을지로3가에 있는 홍콩식 주점에서 보자고 했다. 검색을 해보니 리뷰만 100개 이상인 핫플레이스다. 불금, 힙지로, 핫플레이스 조합에 대기줄이 없을 리 없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6시 정각. 태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년까지만 해도 '퇴근하겠습니다' 또는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였는데 언제부터 바뀐 것일까? 그러고 보니 6시 칼퇴는 올해 들어 처음이지 싶다. 방에 틀어박혀 있던 팀장이 귀신같이 고개를 들어 태백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서린동 MZ사옥을 나온 태백은 청계천을 따라 걸었다. 을지로입구를 지나 을지로3가에 이르러 원래는 인쇄소와 공구가게가 즐비했던 좁은 골목에 들어섰다. 골목 굽이굽이 전에 없던 신세계가 펼쳐진다. 일식, 광동식, 태국식, 베트남식 각양각색 외관을 한 가게 앞에 덩어리로 뭉쳐 있는 일련의 사람들.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가 수북하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지만 예상대로 대기줄이 늘어섰다. 태백은 이름을 적고 밖에 서서 기다렸다. 2월로 들어서면서 한파가 가셨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해 질 무렵의 공기는 차다. 30분을 넘어서자 온몸에 냉기가 퍼진다. 옷깃을 여미고 오돌오돌 떨던 태백은 별안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핫플레이스고 뭐고 몇 시간씩 줄 서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태백씨~"

이나는 정확히 7시에 맞춰 도착했다.

"줄이 이렇게 길었어요?"

"불금...이잖아요. 저도 방금 왔어요."


20여분을 더 기다려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둑어둑한 실내는 중국식 인테리어와 빨간 조명이 어우러져 음식점이라기보다는 마치 점성술사의 공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나는 메뉴를 펼쳐 사천식 꿔바로우와 삼선짬뽕탕, 흑후추삼겹숙주볶음, 칭따오 맥주를 시켰다.


"괜찮죠?"

"다 못 먹어요."

"많이 먹어요. 오늘은 이 누나가 살 테니까. 얼굴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얼굴살요?"

"뭐 걱정 있어요?"

태백은 먼저 나온 맥주를 컵에 가득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찬 맥주가 들어가는데도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걱정 없는 사람이 있겠어요?"

"회사도 더 커지고, 팀 사람들도 좋다고 했고 무슨 걱정일까? 이렇게 얼굴이 상할 만큼..."

"그럼 이나 씨는 어때요? 좋아요?"

순간 이나의 얼굴에 그늘이 지면서 고개가 톡 하고 떨어졌다. 마침 나온 숙주돼지고기 볶음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팀장, 이게 참 쉽지 않은 거더라고요. 진정성과 의욕만 있으면 다 잘될 줄 알았는데..."

"그 본부장...이라는 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제 은인이죠.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고..."

"사적인 관계는 아니고요?"


이나는 고개를 들고 지긋이 태백을 응시했다. 그 어떤 생각도 읽을 수 없는 플랫함. 어떻게 알았느냐는 무언의 질문일까?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경고일까?


"맥주 한잔 줘요"

태백은 이나의 잔에 맥주를 가득 채웠다. 거품이 절반이다. 이나는 단숨에 맥주를 들이켜고는 다시 잔을 내밀었다. 태백은 말없이 잔을 다시 채웠고 이나는 또다시 단숨에 잔을 비웠다.

"난,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태백 씨처럼 신입이었을 때, 본부장님과 2년 정도 일했어요. 그때는 차장님이었죠. 그분처럼 되고 싶었어요. 좋은 사람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죠. 그분 역시 L그룹에 들어온 이유가 사람에 진심인 기업인 것 같아서라고 했거든요. 아시죠? 우리 그룹 핵심가치가 '인본주의'인 거?"

"그룹 창립 70주년을 맞아 CI(Corporate Identity)와 BI(Brand Identity)도 바꾸고 대대적인 재창업 작업마쳤다는 뉴스 봤어요."

"맞아요. 본부장님이 그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죠. 비전, 미션, 핵심가치 따위 무형의 철학을 재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어요. 본부장님 은사셨던 S대 경영학과 교수님들과 최고의 컨설팅 업체를 초빙해서 100page 가까운 컬처북을 완성했죠. 이제 40대 초반인데 그룹의 상징 같은 인물이 됐고 오너 회장님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기도 하죠. 재창업 결과물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선포하고 알리는 과정에서 노출도 많았고요."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대단한...사람이네요."

"맞아요. 그런데... 요즘 제가 괴로운 건...그룹의 심장부에 일하게 되면서 체감하는 현장과의 괴리감이 너무 크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연수원이라는 온실 속에서 지나치게 이상에 머물렀던 건 아닌가 싶은...우리 술 바꿀까요? 고량주 어때요?"

태백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나는 손을 들어 연태고량주 500ml를 주문했다. 큰 포도알만 한 두 개의 하얀 잔에 맑은 독주가 채워졌다. 꿀떡 삼키자 화한 백주향과 함께 불덩어리가 화르르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그룹 재창업 프로젝트가 완료된 후 회장님을 모시고 전 계열사를 돌았어요. 100회가 넘는 회장과의 대화. 말하자면 내재화 작업을 한셈이죠. 그런데 막상 현장분들 만나고 보니 온도차가 상당한 거예요. 아니 냉소와 비아냥 일색이었죠.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총수 일가나 임원들이 하는 짓이란 게 입만 열면 강조하는 '사람'에는 정작 관심도 없고 오직 눈앞의 이익이나 제 앞가림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거죠. 그룹 내부에 흉흉한 소문도 돌아요. 오너 회장님이 수천억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조만간 이슈화될 거다라는 이야기도 있고..."

"오너가 직접 전 계열사를 돌며 인간이니 행복이니 그룹 비전과 핵심가치를 주제로 강연을 한다는 뉴스를 보고 대단하다 싶었는데, 역시 겉으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니군요. 그거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도 힘들었겠어요."

"회장님 일이다 보니 손도 많이 가고 노심초사 긴장 속 스트레스의 연속이긴 하지만, 본질에 닿을 수 있다면 그게 대수는 아니죠. 좌절했던 건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효과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반발심만 더 커졌달까?"

이나는 술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술을 삼켰다.


"천천히 마셔요."

"결정적인 건 사람 이슈였어요. 정기적으로 진행했던 그룹 신입 공채도 없애고 핵심 계열사를 포함해 절반 넘는 계열사에서 구조조정을 했는데, 1년이 채 안된 신입들까지 그 대상에 포함해서 빈축을 샀어요. '사람이 사람답게'라는 인본주의 기업 콘셉트 광고를 대대적으로 하고선 결정적일 때 사람답지 않은 방식으로 몽땅 내보내냐는 비아냥인 거죠. "

"그렇게 되도록 만든 건 사실상 본부장이라는 사람 아닌가요? 그 사람이 재창업 프로젝트를 주도했다면서요? 좋은 사람이고 존경받는 사람이고 대단한 사람이란 평도 넌센스 아닌가요?"

"태백 씨. 이상하네? 왜 그렇게 발끈해요?"

태백은 아차 싶었다.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아차릴 정도였으니까.


"이나하고 연락합니까?"

"그걸 왜 답해야 하죠?"

양해도 없이 태백의 앞자리에 앉은 본부장은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본 거... 이나한테 전해도 좋아요. 본 대로."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롭니다. 이나에게 연락이 오거나 그쪽이 연락할 일이 있으면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하라는 말이에요..."

"왜 그래야 하죠?"

"그쪽이 이나를 조금이라도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선택은 자유지만"

본부장은 오른쪽 입꼬리를 올려 큭~짧은 웃음흘리고는 은장 지포라이터를 열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알아 들었을 거라고 믿어요."

후~

본부장은 하얀 날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태백의 오른쪽 어깨를 툭툭 치고는 포장마차 밖으로 빠져나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우리 MZ의 비전은 꽤나 선명했어요. '인간, 그 존재에 대한 경외를 바탕으로 삶의 의미, 그리고 행복을 큐레이팅하는 사람들'이라고 돼있죠. 처음엔 이게 뭐지? 사기업의 비전과 미션이 맞나?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 냄새나는 거예요. 정말 그럴까? 들어가서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 본부장님 이야기에 왜 그리 열을 내느냐니깐..."

"처음 입사해서는 솔직히 엉망진창인 거예요. 체계도 없고, 리더들은 어리바리해 보이고, 결단력도 없는 것 같고, 위계도 없이 부하직원들에게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고.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게 다. 회사의 철학, 비전이나 핵심가치에 충실한 모습이란 걸 깨달았어요... 마음에 들었죠."

이나는 어깨를 한번 들썩하고는 체념한 표정으로 태백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창업자인 대표님을 포함해서 모두 참 인간적인 사람들이구나. 모르는 건 모른다고 인정하고 저 같은 신입에게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께도 정중하고 격의 없어요. 진짜 '인간적'인 조직이란게 뭔지 제대로 배웠죠. 뭔가 허술한 듯 어설픈 듯한데도 어떻게든 새로운 기회를 찾아내고 그걸 함께 으쌰으쌰 해서 꼭 달성하고야 마는데 그게 기가 막히게 이슈를 타고 막 커져나가는 거예요. 우리 인스타, 유튜브 채널 콘텐츠도 올렸다 하면 수만, 수십만 조회수가 빵빵 터지고..."

"맞아요. 저도 구독자예요. MZ가 모든 Moden Zone의 줄임말이란 것도 처음 알았어요. '모든 사람, 모든 것들이 살아 숨쉬는 구역'이라는 의미를 알게 되고 한방 맞은 기분이었죠."

"채널을 보면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팀별로 어떻게 시작하는지, 그 정제되지 않은 일련의 과정들을 그대로 올려버리잖아요? 일부러 B급 감성을 연출하는 건 아니지만, 카메라 워크도 어설프고 프로페셔널해 보이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좌충우돌하고 그렇게 신나게 떠들고 부닥치고 헤매고 하는 과정에서 꼭 어느 순간에는 아! 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질서가 서서히 잡혀가요. 무모하다 싶은 도전도 뭐 어때? 하면서 해버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게 성수동과 청담동 Dri-angle이죠."

"저도 거기서 옷이나 소품 같은 거 많이 사요. 재밌네요 흥미롭고. MZ만의 내러티브가 명확하달까?"

"내러티브. 바로 그거죠. 이야기를 만드는 것. 스토리텔러. 아마도 저는 거기에 반응했던 것 같아요."

"반응을 한다?"

"어쩔 수 없이 끌리는 그런 반응. 저는 원래 글을 쓰고 싶었어요. 대학을 갈 때도 국문학과에 가고 싶었죠. 집에서 반대를 해서 전공을 바꾸긴 했지만... 뭐든 스토리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수백만 권을 파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겠다는 큰 그림도 그렸죠."

"지금도 그 비전은 유효해요?"

"회사에 들어와서 알았어요. 결국 그 길로 가게 될 거라는 걸. 그런데 마침 회사에서도 그런 기회를 받고 있다고 느꼈어요. 지금 맡고 있는 조직문화 업무가 재밌는 건 그 이유가 크죠. 우리만의 이야기, 내러티브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니까...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믿었어요... 합병 전까지는..."

"지금은..?"

"모르겠어요. 혼란스럽고. 작년까지 선명해 보였던 우리가 가야 할 길, 왜 그곳에 가야 하는지 따위 사이니지들이 몽땅 블러 처리된 느낌이에요. T그룹의 그것들을 아무리 훑어봐도 좋은 이야기긴 한데, 도무지 맞지 않는 옷 같달까?"

"이거였구나..."

"네? 무슨..."

"내가 태백 씨를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느낌, 감정..."


이나는 태백과 자신의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어느새 500ml 술병이 바닥에 가까워졌다. 이나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술잔을 들어 올려 가볍게 톡 털어 넣은 후 태백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내러티브를 만드는 일 말고 또 반응하는 어떤 건 없었어요?"




앞을 못 본 채 태어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비전 없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헬렌 켈러는 말했다.


더 이상 비극적인 삶을 살지 않도록 수를 써야겠다 싶어 선명한 비전을 설정하기로 했다.


'100만 부를 판 베스트셀러 작가'


신간을 냈다 하면 중쇄, 3쇄, 10쇄씩 마구 팔아 재끼고 여기저기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는 그런 초절정 인기 작가말이다. 인간과 조직에 대한 본질을 이해하고 인간다운 삶, 행복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돕는 일. 이건 미션이 될 것이다. 반드시 지켜낼 핵심가치는 '인간에 대한 애정' '호기심' '자존' 이 세 가지다.


[해리포터] J.K. 롤링 정도는 불가능하겠지만(영어권에 태어났다면 혹?) 인생 비전과 미션을 정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아, 그렇다. 가슴이 뛴다.


물론 여즉 현실은 비루하다. 나이는 50대를 향해가고. 퇴사한 지 4년 차. 그 사이 얻은 결과물이라곤 1쇄를 겨우 소진한 책 2권뿐. 시작은 미약했을 망정, 선명한 나만의 북극성이 정해졌으니 묵묵히 읽고 쓰고 그 시간을 축적해 간다면, 와이낫? 나라고 100만 부라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말란 법 없으니까.


NASA에서 우주선을 쏘아 올릴 때 초기에 가장 공 들이는 작업은 '목적지를 설정하고 발사 각도를 정확히 세팅하는 일'이라고 한다. 성공적인 탐사를 위해 고려해야 할 기술적 요인들이 무수히 많지만 계산이 0.0001도만 틀어져도 우주선 자체가 안드로메다로 가기 때문이란다.


이걸 회사에 적용해 보면 목적지를 정하고 발사각도를 조정하는 일은 비전을 만드는 일과 같다. 가서 뭘 연구할 것인지, 그렇게 알게 된 새로운 지식과 통찰은 인류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탐색하는 일은 미션 statement에 비견된다.


뭐 광활한 우주를 날아가 외계행성에 닿는 어마무시하고 거대한 프로젝트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애초에 틀어진 방향으로, 혹은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사람들을 끌어모아 한 배에 태우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면, 영 깝깝한 일일 테니까.


물론 기업의 모양새를 갖춘 조직치고 비전, 미션, 핵심가치 등을 기술해놓지 않은 곳은 드물다. 기업의 탄생과 동시에 가장 먼저 세팅해서 액자(실제액자든, 공식포털이든)에 끼워 놓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들이 깜깜한 밤하늘에 높이 떠올라 밝게 빛나는 북극성이 아니라 정말로 액자 그 자체가 돼버린다는데 있다.


'아름다운 기업'이라며 대대적인 기업광고로 유명했던 K그룹은 오너 일가의 아름답지 못한 경영권 다툼으로 갈가리 찢겼고, '사람이 미래'라며 인재중심 경영을 호기롭게 선포했던 D그룹은 경영위기를 맞아 신입사원들을 대거 해고하는 모순된 행동으로 빈축을 샀다.


어디 이뿐인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신들이 내세운 기업철학, 비전이나 미션, 핵심가치 따위를 실천하기는커녕 분식회계 등 부정을 저질러 파산에 이르거나 오너 일가의 탈세나 불륜, 폭행, 갑질 등 종류도 다양한 일탈로 송사에 휘말리는 일들이 수시로 벌어졌다.


그런 탓이었을까?

'송파구에서 일 잘하는 11가지 방법'이라는 모 플랫폼 기업의 사내지침이 별안간 툭 불거졌을 때 이 땅의 거의 모든 직장인들은 일종의 쇼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아! 회사란 이런 식으로도 운영될 수 있는 거구나! 이렇게도 일할 수 있는 거구나! 아니 오히려 이런 게 더 먹히는구나! 눈앞이 번쩍 했을 것이다. 말로만 듣던 수평적 문화, 자유로운 복장, 오너에게도 할 말 다 하는 쿨한 문화가 실제로도 구현되는 현장을 보며 부러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이는 기업의 무형자산에 대한 인식지형을 근본부터 바꾼 일대사건이나 다름 었었다. 물론 여전히 주류에 속하는 기존 대기업들은 오픈형 사무실을 만들고 직급체계를 줄이는 보여주기식 흉내내기에 그쳤지만, 이후 속속 등장한 스타트업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비전, 미션, 핵심 가치등을 표방하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주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모양새다.


분명한 건, 앞으로의 비즈니스 환경은 눈앞의 이윤에 급급해 인간을 부품취급하는 비인간적 기업보다 장기적이고도 고차원적인 가치, 자신만의 아이덴티티가 명확한 인간적 기업이 유리할 전망이란 점이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성의 차원을 넘어 수익의 차원에서도 그렇다. 내부인인 구성원은 물론, 외부인인 고객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한 '가치소비'가 대세가 될 것이기 때문에.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끝그림을 가졌는지, 어떤 고집이 있는지 따위, 그것이 맞건 틀리건 일단 내 내면의 무언가를 강하게 자극해 꿈틀거리게 하거나 가슴뛰게 하지 않는 대상에 열광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므로.


만화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의 꿈은 '해적왕'이 되는 것이다. 해적왕. 이렇게 선명한 비전이 또 있을까? 해적왕이 되려는 이유 역시 간단명료하다. '가장 자유로운 녀석이 되는 것' 더 이상 외롭지 않고 모두와 친구가 되어 파티를 열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미션은 '동료들을 모으고 항로를 누비며 모험을 통해 원피스를 손에 넣는 것'이다. 밀짚모자 해적단의 완성, 고잉메리호의 진수, 현상금 50억 베리 따위 세부 비전들도 착착 현실화된다. 이 과정을 통해 루피와 밀짚모자 해적단은 최종 미션과 비전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루피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 비전과 미션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면,  "내 동료가 돼라" 며 내민 손을 기꺼이 잡을 수 있을까?


"조직의 핵심 가치를 지키고, 존재 이유를 강화하며, 열망을 향해 꾸준히 전진할 수 있게 자극하는 방향으로 조율되어 있는지를 확인한다. 다른 행성에서 온 방문객(외계인)이 그 조직에 들르더라도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지 않고 비전을 추측해 낼 수 있다면 훌륭하게 조율된 상태다."

짐 콜린스는 말했다.


자 이제 우리 회사의 비전, 미션 꺼내서 읽어보자. 아, 그런데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흠. 뭔가 기억이 날 듯한데, 혁신이니 열정이니 그런 게 들어가 있긴 한 것 같은데 막상 생각해 보니 잘 기억이 안 난다고? 복도 어딘가, 회의실 어딘가, 화장실 변기 앞에 붙어 있는 것 같은데 오며 가며 수없이 본 것 같은데 질문을 받으니 머리가 멍해진다고? 사실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답이 나왔다. 우리 회사에 방문한 외계인은 틀림없이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비전은 일을 하는 목적이자 전략을 세우는 원동력. 모든 결정은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걸음임을 인식해야 한다.




먼지 묻은 액자부터 떼어내고 현실의 그것으로 바꾸자

'9시 1분은 9시가 아니다'

이 얼마나 센스 있고 핵심만 딱 짚은 생동하는 문구인가. 지각하지 말라! 한없이 불친절한 금지명령에 비하면 지극히 인간적이고 신선하다. 썩은 토마토 지수 9쯤 된다. 9시 1분은 절대로 넘지 않겠다는 의지가 뿜뿜 샘솟는다.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있는 문장이 행동지침으로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여기에 모여있고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이윤과 기업 생존을 넘은 궁극의 가치는 무엇인가?

다소 허황될 망정, 아 저런 비전이 달성되면 정말 좋겠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큰 그림을 가지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진지하게 답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를 구체화하는 것이 바로 조직문화 활동이다. 외부 컨설팅을 불러 팀빌딩이라는 명목으로 '도전 10초' 따위 게임을 진행하고 별 실효성도 없는 '나의 다짐'을 플립차트에 써서 조별로 돌아가며 발표를 하고, '내년에도 화이팅!' 따위 구호를 외치며 으쌰으쌰 뒤풀이하는 일이 전부가 되어선 안된다.


전담 부서가 없다면 그것부터 공들여 만들고 있다면 최고의 직원들로 새롭게 구성해 권한과 책임을 몰아주자. CEO직속 조직으로 만들거나 최소한 담당 임원을 지정해 정식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형편에... 인사나 총무에서 병행하면 안 될까? 아서라. 그런 사정이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내버려 둬라. 본업을 두고 병행하는 일은 99.9% 제2, 제3의 일로 밀리기 일쑤다.


비전 워크숍은 제대로 공들여서 깊이 있게 진행하라.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갈 곳을 선명히 하고 왜 그곳에 가야 하는지 교감을 얻는 일, 우주선을 발사하기 전 도착 지점과 각도를 조정하는 일이 한낱 일회성, 이벤트성이 되어선 곤란하다. 발사 이후 궤도를 수정하는 일이 더 고되고 힘들고 돈도 더 많이 든다.


최고 경영진의 의지, 실무리더의 참여는 필수다. 일이 바빠서요~ 이런 말 자체가 나와서는 답이 없다. 자포스 Zappos의 창업자 토니셰이는 '자포스 웨이'를 만들 때 100여 개에 달하는 미션 statement, 행동지침, 핵심가치를 직접 작성해 전 구성원에게 공유하고 수차례의 오프라인 워크숍과 수시 이메일 소통을 통해 조율을 거쳐 최종 10개를 추리는 작업을 직접 이행한 바 있다.


먼저 개인의 꿈과 비전부터 상상하고 그리는 연습을 해보자. 시간이 걸리고 더디게 진행되더라도 개인의 꿈과 비전을 상상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열리고 마침내 움직일 동력을 얻는다. 개인의 그것이 모여 더 큰 조직의 그것에 얼라인 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 먼저냐? 를 따질 필요도 없다. 조직의 비전과 미션이 명료하다면 누구보다 비슷한 사람들이 그 빛에 끌리게 마련이다. 그들을 잘 선별해 로켓에, 버스에, 배에 태우기도 용이해진다.


가지고 놀게 하라

요즘 세대들. 콘텐츠 만들기 귀신이다. 스스로 관심 가고 흥미 있는 일이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서 하기 마련이다. 퇴근 후 개인 시간을 내서라도 꼭 붙든다.


액자에서 내린 현실의 비전, 미션, 핵심가치를 다양한 방식으로 가지고 놀게 하라. 공식포털에만 턱 올려놓지 말고 유튜브, 인스타 따위 모든 채널을 동원해 모든 형태의 콘텐츠로 끊임없이 무형의 자산을 노출케 하라. 자발적으로 참여할 의사가 있는 내부 구성원의 재능을 활용하라. 가능하다면 시설을 지원해 주고 PD, 작가, 크리에이터를 자원하게 하라. 그리고 그 일을 자신의 업무 50%로 인정해 줘라.


숫자로는 가슴이 뛰지 않는다. 연 매출 150% 달성, 순이익 20% 상승 따위 따분한 비전은 CEO, CFO들에게나 줘버리고 실행단의 구성원들은 마음을 뒤흔들자. 한계도 제한도 정형화된 틀도 없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자. 우리가 해왔던 게 아닌데? 예전엔 안 그랬는데? 외부에 맡기지 그래? 이딴 소리 집어치우고 뭐가 됐든 이들에게 맡겨라.


B급정서여도 좋고 아마추어 느낌이 물씬 나도 좋다. 어떤 형태로든 마음껏 콘텐츠를 만들고 노출할 수 있도록 독려하라. 두루뭉술 일반적인 서술로도 감이 안 온다. 우리의 궤적에 대해 스토리텔링하라. 우리의 이야기여야 한다. 서사를 내러티브화해 과거와 현재를 기술하고 미래를 상상해 지난 궤적과 연결시켜라.


그 가슴 벅찬 도착점에 기꺼이 마음을 열고 동참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만드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물건을 우리를 통해 사도록 하겠다"라는 아마존의 미션, 그 비전은 아마존고, 아마존대시, 물류센터의 대규모 확충 및 100% 자동화 같은 구체적 실현으로 이어졌다.


답은 모두가 살아 숨 쉬는 그곳, 바로 현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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