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문화를 다루는 궁극의 목적은 '신뢰'를 구축하기 위함이라고 믿는다. 회사와 구성원 간에, 동료와 동료사이에, 나 스스로에 대한 신뢰까지. 지금까지 다뤄온 '동기부여', '정서지능', '안정감과 팀십이라는 환경'의 요소 모두 사실상 '신뢰'를 만들기 위한 워밍업에 가까웠다.
사실 신뢰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17년간 조직문화와 사람을 다루면서 좀처럼 풀지 못했던 숙제처럼 그 실체가 딱 잡히지 않았다. 인간관계에 신뢰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라는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신뢰를 쌓기보다 저버리기 일쑤인 사람과 사건들을 수시로 목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뢰에 대해 어떤 통찰을 갖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아파트 공화국이 되어 선분양 후시공이라는 기형적 관행이 상식이 된 탓일까? 건설사들의 황당하고도 비극적인 사고 뉴스들이 들려오면서다. 모 지방에서 신축 중인 아파트가 무너져 사망 사고가 발생했고, 수도권 또 다른 아파트 신축현장에서도 주차장이 붕괴됐다는 일련의 소식들.
무슨 일이래? 그 주인공은 이름만 들어도 아! 하는 대기업 건설사들이었다. 조사 결과 안전에 직결되는 내력벽을 지탱하는 철근이 절반이나 누락되었고 강도 문제로 금지된 비 오는 날 콘크리트 타설장면이 포착되는 등 심각한 일탈이 드러났다.
문제는 사고 발생 후 이들의 대응이다.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척했지만 피해 보상 과정에 잡음이 일고 사고 이후에도 변함없는 행태가 반복되는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탓인지 인터넷상에 뼈대 없는 아파트라는 의미의 '순살X이'라는 신조어가 돌았다. 끔찍하다. 사람이 실제 들어가 살아가는 공동주거공간인 아파트 브랜드에 붙는 별명이라니.
그 뉴스를 곱씹다가 문득 신뢰란 무언가 형태를 이루고 버티게 하는 뼈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건물 구조 전체를 안전하고 튼튼하게 받히는 빽빽한 철근 같은 것. '안전'이라는 핵심가치를 상실한 아파트, 그 불신을 자초한 굴지의 건설사. '관행'일 뿐 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도 될까? 단순 착오나 실수도 아니고 대놓고, 작정하고 안전 기준을 어긴 고의에 가까운 사고 아닌가?
비상식적인 사건사고들이 빈번한 야만의 시대. 이런 일쯤이야 만성이 되기라도 한 것일까? 우리가 수십 년씩 살아가야 하는 아파트를 이따위로 짓고 있다는데, 사람이 죽거나 다쳤는데, 사고 이후에도 똑같은 행태가 반복되어 어디에서 어떤 문제가 터질지 모른다는데 비교적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놀라면서도, '순살'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내부인들은 어떤 심정일까? 그들은 이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있을까? 아니면 기본이 무너진 내부 문화에 일치감치 매몰되어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일을 하고 있을까?
핵심사업분야에서 치명적 사건사고가 연이어 발생하는 기업의 내부가 정상일 리 없다. 사고 그 자체는 물론이고 사후 수습과정을 보면 단순실수인지 철저히 망가진 내부 문화 때문인지 에둘러 짐작이 가능하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간 '잊혀지겠지' 라는 냄비근성을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신뢰상실은 그들의 생각보다 대단히 크고 무겁고 뼈아프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들은 내외부의 각종 사건 사고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디즈니의 이야기다. CEO 밥 아이거는 자회사인 픽사의 CCO 존 래시터가 성추문 파문을 일으키자 즉각 당사자를 불러 진상을 파악하고 6개월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결의했다. 이후 CEO명의의 사과문을 전 직원에게 직접 공표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존 래시터 역시 구구절절 변명보다는 사과문을 올리고 회사의 조치에 응했다. 그의 정직 기간이 만료되자 조치가 부족했다고 판단한 밥 아이거는 끝내 존을 해고한다. 픽사의 시작이자 크리에이티브를 책임져온 전설적 인물을 단호하게 내쳤던 이유는 회사 차원의 손실을 따지기에 앞서.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밥 아이거가 직접 언급한 바 있다.
이후 ABC 인기 프로그램인 '로잔느 아줌마'의 진행자인 로잔느가 트위터상에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키자 밥은 프로그램 자체를 전격 폐지하고 어떤 형태의 인종차별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회사와 브랜드의 신뢰를 지키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존슨앤드존슨의 CEO제임스 버크 역시 회사의 크레도와 관련한 인상적인 일화를 남겼다.
1982년 시카고에서 타이레놀을 복용하고 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불상의 인물이 타이레놀 포장을 뜯어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건. 회사의 직접 귀책은 아니었지만 타이레놀 스캔들은 미전역으로 퍼져 브랜드에 큰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한다.
제임스 버크는 즉각 진상을 대중에 알리고 '고객의 안전'이라는 크레도에 따라 타이레놀을 전량 리콜하기로 결정한다. 심지어 미국의 보건당국은 시카고 지역에 한해 리콜을 권고했지만 '고객의 생명과 안전'이라는 크레도 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다며 회사 차원의 천문학적 손실을 감내하기로 결정한다.
이후 존슨앤드존스의 기업이미지는 독극물 제조 회사에서 공중 안전기관 수준으로 탈바꿈한다. 위조 불가능한 포장 방식을 새롭게 설계 제작하고 교환 환불 프로그램을 개발했으며 재발방지 프로그램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이행했다. 이후 0에 수렴했던 매출이 치솟아 원래 수준 그 이상을 회복. 타이레놀 사태는 기업의 위기를 다스리는 절대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디즈니와 존슨앤드존슨 양사 모두 사건, 사고 당시 잠깐의 타격을 입었지만 최고 경영자의 '무엇이 옳은가?'라는 가치관에 부합하는 즉각적 조치로 고객과 시장 무엇보다 내부 구성원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오히려 기업 가치가 오르고 위대한 기업, 존경받는 기업으로 거듭났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앞선 우리 건설사들의 행태와 비교하면 어떤가?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대형사고를 일으키고도 이렇다할 대응책이 보이지 않는다. 머리만 숨기고 '이또한 지나가리라'의 신념으로 유야무야 넘어가길 바라는 어리석은 꿩의 모양새는 아닐까?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사고 실험을 한번 해보자.
혹시 조직 내에 누군가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볼드모트'같은 절대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 누구도 그 앞에서 NO를 못하기 때문일지도 몰라. 상식과 규칙, 규율, 심지어 법을 위반하는 일이 상시로 벌어져도 '그분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무언의 규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수의 구성원들이 문제가 있어도 외면하고 쉬쉬하고 가만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분위기 속에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을 안고 일하는 중일지도. 그 과정에서 저런 끔찍한 문제들이 터져 나오는 것은 아닐까?
조직 생활을 하는 데 있어 신뢰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조직문화를 만들고 이행하고 노심초사 신경 쓰는 궁극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상호 간 신뢰를 만들기 위함이다. 상사와 부하 간, 동료 간, 부서 간 신뢰 없이 제대로 진행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조직의 신뢰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핵심은 역시 리더다. 경영진이다. 그들이 어떻게 비전을 제시하고 진정성 있게 소통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도록 만들 것인가? 의 문제다. 그저 나를 믿고 따르라 외치기만 한다고 저절로 생기는 전리품이 아니란 말이다.
구성원의 신뢰를 잃은 기업, 경영진은 양치기 소년의 처지와 같다. 양치기 소년이 꼭대기에 있는 기업의 미래는 그야말로 끔찍하다. "늑대가 나타났다"라는 소년의 외침에 마을사람들은 처음엔 도와주러 오지만 두 번, 세 번, 거짓말이 반복되면 진짜 위기에서 믿고 따를 사람이 없게 된다.
이는 말과 행동이 다른 데서 비롯한다. 시공 중인 아파트가 무너지는 건설사에 남은 신뢰는 과연 무엇일까? 신뢰는 종이와 같다. 한번 구겨지면 원상태로 되돌리기 힘들다. 어찌어찌 가능하겠지만 노력대비 효과가 아깝다. 처음부터 구겨지지 않도록 모든 힘을 쏟거나 새 종이로 갈아치우는 것이 더 낫다.
MEET의 마지막 키워드인 신뢰. 이것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그 구체적 이야기로 들어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