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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누구나 방황할 수 있어

by 흐름 Feb 2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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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스님, 집착은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는데, 결국에 집착이란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붓다께서는 집착을 하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요. 이것은 모순 아닙니까?”


어디서 왔는지 모른 젊은 보살의 어려운 질문에 스님들께서는 나를 피하곤 하셨다.


나는 집착과 노력의 차이는 무엇이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집착이 아니길 바라며 그 개념에 대해 집착했다. 지금까지의 나는 주어진 임무에 뒤 돌아볼 새 없이 정신없이 달려왔다. 어쩌면 나는 선택권이 없었다. 끊임없는 숙제, 시험, 과제, 면접에 치이며 살았다. 경주마처럼 달렸다. 그러다 한 번 돌에 걸려 넘어졌는데, 내가 달리던 이 길이 나의 길이 맞나?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내가 무분별하게 달려왔던 것은 아닐까, 내가 가고자 하는 결승점에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는 넘어진 것을 핑계 삼아 여기서 멈추고 싶은 것일까, 너무나도 헷갈렸다.


그러나 노력과 집착은 그저 개념에 불과했다. 때로는 노력이 집착이 되고, 때로는 집착이 노력이 되는 것이 노력과 집착 또한 그저 ‘그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알아차림이었다. 한 스님께서는 나에게 전생에 선덕을 쌓았다고 하셨다. 대개 사람들은 무분별한 노력으로 무언가를 집착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게을러 종래의 인간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와 집착과 노력의 차이를 찾으려 한다니, 기이한 보살이 한 명 들어왔다고 하셨다.


“보살님께서는 자전거를 탈 줄 아십니까?”


“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처음 자전거 탈 때를 기억하십니까?”


“글쎄요, 기억은 하는데…”


“오른쪽으로 넘어지셨습니까, 왼쪽으로 넘어지셨습니까?”


“네?”


종잡을 수 없는 스님의 질문에 나는 당황했다.


“오른쪽으로도 넘어지고, 왼쪽으로도 넘어졌겠지요. 그러나 넘어지고 나니까 어떻습니까? 너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하는 여러 개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분별된 세상에 있다고 착각을 하죠.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입니다. 노력과 집착 또한 마찬가지이지요. 보살님께서는 이 개념들을 분별 지으려고 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모든 것이 하나이지요. 판단과 분별로부터 멀어지려고 하세요. 그럼 보일 것입니다. “


너무나도 어려운 말이었지만 조금은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력과 집착이란 마치 처음 자전거를 배우는 어린아이의 오른쪽과 왼쪽 같은 것이구나. 어쨌든 중도를 향하는 길목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노력과 집착의 차이를 알려고 하는 내가 무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노력과 집착에는 차이가 있다고 착각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중도를 향해가는 길목에 노력도 했다가 집착도 했다가,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탈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결국 나는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갔다가 또다시 오른쪽으로 가는 것을 반복하는 중생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 자리가 바로 그 깨달음의 자리라는 것 또한 알아차렸다.


절에 있을 동안 나를 잘 인도해 주셨던 스님께서 봉정사 꼭대기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일반인 진입이 되지 않는 곳이었는데 걷고 또 걸어 선수행하는 곳으로 인도해 주셨다. 거기서 안동 시내가 모두 보였다.


“저기 보이지? 저기가 자네가 있어야 할 곳이네. 재가수행을 하게. 자네의 꿈을 펼쳐. 그러나 언제든 머리를 깎고 싶거든 내게 와, 내가 깎아 줄게.”


툭하면 머리를 깎겠다고 하고, 머리를 깎아 주겠다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우리 이제 집착에 집착하지 말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노력과 집착에 차이가 있을까? 답은 없다. 없는 답을 찾으려 하니 우매한 것이었다. 알려고 한 것도 무지했으며, ‘알았다, 깨달았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오만이었음을 인지했다.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선택권이 있다고 우리는 착각을 한다, 고로 우리는 방황을 한다. 그러나 두 갈래의 길목 뒤에 하나의 길로 이어지듯이, 우리는 다시 ’ 여기‘서 만나게 된다. 지금 이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하는 자리임을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나의 감정은 괴로울 수 있다.) ‘나’는 그저 ‘여기‘에 서 있는 ‘나‘를 떼어 놓고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숨 쉴 뿐이다. 그뿐이다.


절에서 내려와 안동 시내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 던>을 읽었다. 국제정치학계의 필독서인데 두꺼운 고전을 아무 생각 없이 읽고 싶어 갖고 내려왔다. 거기에 나오는 한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다:

욕망(passion)이 없으면 멍청함(dullness)이 되고, 무차별적이면 현혹(giddiness) 오뇌(distraction)가 된다.


무릎을 탁 치며, 이것은 내가 찾던 집착과 노력의 차이가 아닌가. 이 차이를 절이 아닌 정치학 고전에서 찾게 되다니, 나는 역시 국제정치를 계속해야 하나 봐 라며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봉정사 숲길에서봉정사 숲길에서




[요마카세]  수요일 : 집착과 노력사이

작가 : 요기니 다정

소개 : 국제 정치 배우다 요가 철학에 빠지게 된 사연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집착을 내려놓지 못해서라고 하는데, 내가 잡고 있는 것은 집착일까 노력일까 방황하며 지냈던 세월을 공개합니다. 누구나 힘들 수 있고, 누구나 고민할 수 있는 그 질문들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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