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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Oct 14. 2024

단테의 별 - 1권 2부 24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존경도 사랑? - (16)

다음날 점심시간에 송귀남이 용기 내어 문승협을 찾아갔다. 짐을 벗은 듯 한층 밝은 표정이었다.

“승협아, 미안해서 으짜까.”

“괜찮아?”

“인자는 괜찮해. 근디, 니 진심을 몰라서 미안타야.”

“친구끼리 고맙다 미안하다, 그러는 거 아니래.”

“누가야?”

“있어, 내 국민학교 친구들.”

“뭐시어, 니 국민학교 친구만 친구고, 우리는 그냥 거시기여?”

“음메 깜짝이야, 수다라, 제발 인기척 좀 하자.”

“아따 이 송사리 시끼, 엊그제까지만도 죽상이 드만. 으째, 인자 좀 살만하냐?”

“염병, 니나 그 죽상 좀 펴라. 안 그래도 저번에 승협이가 찾아와서 너 뭔 일 있냐고 묻드만, 뭔 일이여?”

“맞아, 나는 그때 너희 둘이 싸운 줄 알았다야. 정훈아, 무슨 일 있어?”

“뭔 일 이겄냐, 학생인께 공부가 고민 이제.”

“진짜 공부가 고민이어? 딴 일은 없고?”

“…….”

“이 시끼, 말 못 한 것이 딴 고민 있그만? 니가 분명히 말했다잉, 친구 뒀다 어따 쓰냐고.”

“아 아니어, 공부여 공부.”

“진짜여?”

“지 진짜여, 공부란께.”

“공부가 으짠디야?”

“공부를 해도 해도 맨날 그 성적이어, 늘지를 안 해.”

송귀남은 공부가 고민이라는 이정훈말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이정훈은 반석차 15등에서 오르내리는 성적이었다. 잘하는 편임에도 유달리 성적에 집착했다. 늘 10등 안에 드는 게 인생최대목표라고 떠들고 다녔다. 최고성적이 11등이라 다들 그냥 하는 푸념인 줄 알았다. 국민학교 때부터 주산학원을 다녀서, 수많은 대회에 참가해 최고상을 받은 월등한 주산 실력을 가졌다. 수학을 잘하였을 뿐 아니라 말하기를 좋아해 영어교과서 예문을 줄줄 외웠다. 글씨도 잘 써서 한문선생에게 예쁨 받았다.

문승협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정신적 지주인 서수연선생과 의논해 보자고 제안했다.

송귀남이 당장 가자며 교무실로 앞장섰다. 이정훈의 대변인처럼 서수연선생에게 구구절절 설명하였다.

“선상님, 수다리가 이런 정황인디 으짜믄 좋겄소?”

“정훈아, 지금도 상위 성적인데 만족스럽지 않아?”

“예.”

“지금 성적에서 더 올리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

“그냥, 더 잘하고 싶어서 그러지라.”

“다른 이유는 없고?”

“예?”

“예를 들면, 부모님 기대가 크다던 가.”

“…….”

“너를 보니 오은영선생님이라고, 내 은사님 말씀이 생각난다. 성적으로 살지 않고, 꼴등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보는 것, 틀려도 한번 더 풀어볼 용기로 평생을 살아갈 태도를 배우는 거라고 하셨어.”

“최선을 다했는디도 안된께 고민이지라우.”

“호호, 나도 너처럼 똑같이 말했어.”

“그 은사님이 뭐랍디까?”

“최선을 다한다는 건, 결과에 따른 감정까지도 겪어내는 거라고.”

“…….”

“그래, 다른 고민도 아니고 성적 올리는 게 고민이라면, 학습방법을 한번 바꿔보자. 내가 보니까, 국영수는 잘하는데 기술 같은 암기과목 하고,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국사나 물상이 좀 약하더라.”

“선생님, 야자시간에 스터디그룹을 하면 어떨까요?”

“오, 승협이 아이디어 좋은데?”

“선상님, 고마워서 으짜까라우. 이리 신경 써준께, 감지덕지하요.”

“정훈아, 공부 한만큼 실력이 늘겠지만, 결과까지 비례하지는 않아. 열심히 한 노력, 네가 알고 우리가 알잖아, 그거면 돼.”


이날 야간자습시간이 시작되고, 서수연선생이 반아이들에게 공지했다. 야자시간에 혼자 공부해도 무방하나,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공부해 보라며 권유하였다. 인원수든 공부방법이든 자율적으로 결정하라고 했다.

반아이들이 생전처음 들은 스터디그룹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하였다. 서수연선생이 제차 알려주었다.

문승협, 안광호, 이정훈이 한 조가 되었다. 문승협은 이해와 흐름파악이 빨라 국사와 물상 과목을 맡았다. 안광호가 요약을 잘해서 기술 같은 암기과목을, 이정훈이 국영수를 총정리키로 했다. 수업시간표에 맞춘 야자시간표를 만들었다. 문승협과 안광호는 전교 10등 근처여서 이정훈위주로 공부하였다. 이정훈도 아는 사실이라 고맙게 생각했다.


아침 6시부터 일상을 시작해 저녁 11시 즈음 집에 들어가는, 이제 겨우 중학교2학년의 기계적인 학교생활은 피곤 자체였다. 야자시간이 끝나고 버스 타러 가는 길만큼은 즐거움이며, 엔도르핀이 샘솟는 하굣길이었다.

문승협이 예와 다름없이 이정훈과 버스 타러 갔다. 큰길을 나와 버스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버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쳐다보았다. 이진구가 침을 뱉고 버스와 함께 유유히 지나갔다.

문승협은 눈 쪽에서 흘러내리는 침을 손으로 대충 훑어냈다. 황당한 나머지 멍했다가 버스를 쫓아가려고 몇 걸음 달렸다. 따라잡기에는 이미 멀어져 포기하였다.

이정훈이 급히 화장실을 찾아 문승협을 데려갔다. 문승협은 수돗물로 깨끗이 씻어냈으나, 가시지 않은 비릿한 침냄새가 역겨웠다. 당시 버스 안에서 조롱하는 이진구의 눈빛과 지켜보던 주위 시선들이 자꾸 떠올랐다.

체육시간 대결 이후, 이진구입지가 학교생활에서 조금 위축됐지만, 빠른 입단속에 소문차단으로 이전과 큰 차이 없었다. 보통 싸움에서 한번 지면 회피하는 게 심리인데, 이진구는 무슨 악감정인지 보복을 택했다.

문승협은 이진구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으나, 최선경소문을 악의적으로 조작해 퍼트린 후로는 눈에 거슬렸다. 송귀남을 괴롭힌 사실을 알게 되면서 누군가를 두들겨 패주고 싶은 마음이 처음이었다.


다음날 등교하면서 이진구를 어찌할지 고민하였다. 1교시가 끝나자, 송귀남이 찾아와 어제 무슨 일었는지 물었다. 곧이어 황민이 찾아왔다. 2학년 전체에 소문이 퍼지는데 2교시면 충분했다.

이진구가 문승협에게 모욕 주려고 소문을 퍼트린 것이었다. 당시 목격한 아이들을 겁박해 소문을 확산시켰다. 소문이 다 퍼진 2교시가 끝났을 때까지만 해도 목적을 달성한 듯 보였다.

문승협은 더 이상 고심할 이유가 없어졌다. 반드시 응징하리라 마음먹었다. 역으로 소문을 명분 삼았다. 이진구를 찾아가 맞짱 뜨자고 하였다.

2학년은 대체적으로 네 갈래로 여론이 나뉘었다. 전혀 관심 없는 무심파, 잘잘못보다 힘의 우위에 편승한 대세파, 잘못한 일에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정의파, 피해자로 빙의되어 대신 혼내주길 바라는 동정파였다. 이상한 것은 학생들 사이에 다 알려진 싸움인데도 교무실은 전혀 몰랐다.


정규수업이 끝난 저녁식사시간, 문승협과 이진구가 중학교운동장 안쪽 구석에서 만났다. 이진구가 껄렁한 아이들 여럿과 함께 온 반면, 문승협은 혼자였다. 이진구가 접근 말라고 엄포해 누구도 얼씬하지 않았지만, 못난이형제들이 먼발치서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같이 가겠다며 따라나섰으나 문승협의 강한 만류에 어쩔 수 없었다.

문승협이 이진구패거리에 둘러싸여 싸움이 시작되려는 긴장된 순간, 언덕 쪽에서 대여섯 명이 내려왔다. 이진구패거리가 차렷자세로 깍듯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3학년 싸움짱과 그를 따르는 무리였다. 이진구패거리들이 바짝 군기 들어 열중쉬어자세를 취하였다. 3학년 싸움짱이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깊게 빨아 삼켰다.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문승협을 같잖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문승협은 바짝 긴장하면서도 위축되지 말자며 스스로 다독였다. 시선을 제압당하지 않으려고 버텼다. 3학년 싸움짱이 싸움을 잘해서 어린 나이임에도 깡패조직에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눈 깔아.”

“네?”

“눈 깔으라고 이 새끼야.”

“…….”

“니는 씨발, 선배들 보고도 인사도 안 해?”

“아, 죄송합니다, 긴장해서 깜빡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깜빡했습니다? 크크, 깜빡할게 따로 있지 씨발 놈아. 근디, 씨벌 놈이 서울 말 쓴다잉.”

“…….”

“아야 짱구야, 저런 좆만 한 새끼 하나 해결 못해서 우릴 불렀냐?”

“호 혹시나, 저 새끼가 떼거지로 올까 비 그랬어라.”

“어떠코롬 해주까, 반 죽여주믄 되냐?”

“아야 모영욱, 요즘 학교도 안 나오드만, 여그서 뭐더냐? 무자게 오랜만이다잉.”

“뭐시어, 남강이 니가 여그는 으짠 일이냐?”

3학년 싸움짱 이름은 모영욱이었다. 모영욱패거리 중에 험상궂게 생긴 한 명이 린치를 가하려고 문승협에게 다가서는 찰나, 선배 남강이 뛰어왔다. 문승협은 국민학교 때 동산에서 싸웠던 상황과 데자뷔 한 느낌이었다.

“내가 뭔 일이겄냐, 내 동상 좀 챙기러 왔제.”

“저 좆만이가, 니 동상이냐?”

“잉, 피는 나눈 거 없는디, 그 이상이다야.”

“그라믄, 형제끼리 2대 2로 한판 뜨끄나?”

“그래도 좋고. 근디, 내 동상이 보통이 아닌께, 놀라지는 마라잉.”

“허허허, 내가 니 뱃심 하나는 알아주께. 진짜 뭔 일이여, 니 동상 맞어?”

“아야, 내가 뭐 한디 느그한테 거짓 갈 하겄냐. 그라고, 이놈 둘 다 조동구랑 친한 친구여. 괜시리 니가 참견하믄, 조동구가 꽤 서운해할 것이다.”

“뭐여? 저 새끼도 문일중2학년 좃똥구 친구라고?”

“내가 언제 헛소리 하디, 쓰잘데 없이 자꾸 반복 재생하게 하냐.”

“영욱이 성, 저 놈은 조동구랑 별로 안 친해라우.”

“짱구야, 니는 아가리 닥치고 있어라잉, 어디 성들 야그한디 끼어드냐?”

“아야 영욱아, 둘이 1대 1로 맞짱 뜨기로 한 것인께, 사내답게 맞짱 뜨라 하고 우리는 가자.”

“둘이 맞짱? 짱구, 이 씨끼 사실이어?”

“…….”

“그래 놓고 비겁하게 우리를 불러? 아야, 쪽시럽다, 우리는 가자.”

모영욱패거리와 남강이 떠나고 못난이형제들이 뛰어왔다. 눈치를 살피던 이진구가 흙을 한 움큼 집어 문승협 얼굴을 향해 뿌렸다. 눈에 흙이 들어간 문승협은 몸을 돌려 털어내기 바빴다. 이진구가 달려드려고 하자, 못난이형제들이 문승협을 둘러싸고 막아섰다. 이진구패거리들이 덤벼들까 말까 주춤하는 사이, 문승협이 흙을 다 털어내고 못난이형제들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이진구가 잠시 한눈판 문승협에게 도둑펀치를 날렸다. 문승협이 오른발을 뒤로 반걸음 물러나면서 상체를 오른쪽으로 빠르게 돌렸다.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이진구주먹을 피하면서 몸이 꼬인 탄력을 이용해 강력한 오른손훅을 이진구의 왼쪽턱에 정확히 꽂았다. 이진구얼굴이 돌아가 휘청하더니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문승협이 이진구를 돌려 눕히고 올라타 멱살을 잡았다. 주먹을 들어 내려치려다 멈췄다. 대항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이진구몸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진구패거리들이 놀라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도망쳤다. 못난이형제들이 이진구를 일으켜 바위계단에 앉혔다. 문승협이 이진구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을 때리고 따돌림시키면서 괴롭히는 이유를 물었다.

“아그들을 따돌림시키믄, 지배하는 기분이어. 나를 보고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믄, 엄청난 힘을 갖은 존재감을 느끼제. 근디, 진짜로는 그렇게 거창한 거 없어야. 그냥 해본 거여, 하다 본께 그렇게 된 것이어.”

“그래? 그렇게 죄라는 걸 모르니까 계속하는 거고, 너도 모르게 괴물이 되는 거야.”

“야 서울 놈, 모두 너를 좋아한다고 착각 마라잉. 적어도 나는, 니가 뭣을 해도 싫은께.”

“그래, 그것은 너의 자유니까,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사람을 괴롭히는 건 죄악이야.”

문승협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거나 좋아하도록 의도한 적은 없었다. 다만 미움받지 않으려는 노력을 많이 했었기에 가슴 한편이 뜨끔하였다. 한 사람쯤은 자신을 미워하게 내버려 두자며, 이진구에게 미움받을 권리를 행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송귀남이 곧 야자시간이라고 했다. 문승협과 못난이형제들이 교실 쪽으로 걸었다. 이정훈이 흙 묻은 문승협의 교복을 털어주면서 얼굴에도 흙이 묻었다며 수돗가로 가서 씻자고 하였다.

줄줄이 수돗가에 서서 말없이 각자 씻었다. 이정훈이 갑자기 손가락으로 수도꼭지를 반쯤 막더니 못난이형제들에게 수돗물을 분사했다. 너도나도 참전하여 좌우로 수돗물을 흩뿌렸다. 물장난으로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못난이5형제는 너나 할 것 없이 물에 흠뻑 젖었다. 조금 전 있었던 싸움의 긴장을 물장난으로 풀었다. 서로가 있어 힘이 되었음을 웃음으로 감사하였다.

교실로 가면서 교복자락을 수건삼아 대충 물기를 닦았다. 다들 물에 젖어 추레한 모습이었지만, 오래 묵혀 논 골머리 아픈 숙제를 풀어낸 것처럼 마음만은 상쾌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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