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단상』- 8
이해(理解).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당신의 생각과 행동의 동기를 풀어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 그럴 수 없다.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나의 착각일 뿐이다. 어렴풋이 그 근처까지 다가갈 수 있더라도 진정한 해답에는 이를 수 없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이해했다고 단정 짓는 건 오만함이며, 어쩌면 상대의 마음을 모두 꿰뚫을 수 있다는 자만이기도 하다. 이 확신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대학 시절, 유독 결혼이라는 제도를 부담스러워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결혼 후 자신에게 얹어질 또 다른 의무를 버거워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 결혼은 의무감보다는 행복이 크지 않을까"라는 대답을 했었다.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그의 가족과도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렇기에 결혼 후의 일련의 상황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의무라기보다는 새로운 가족이 더 생긴다는 기쁨에서 출발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뭐, 나날이 늘어가는 책임이 부담되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최근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요 근래 나는 종종 어린 조카를 돌보고 있다. 많은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육아에 직접 참여하니 그동안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적어도 내 주변에는 육아와 가사가 여전히 여성 쪽으로 무게추가 확연히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나와 매형이 조카를 함께 놀아줘도, 누나와 조카의 유대감은 이길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누나는 살림도 해야 했다. 매형이 아무리 같이 한다 해도, 결국엔 6 대 4 정도는 누나의 몫이었다. 결국 그녀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물론 모든 가정이 그럴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내가 직접 그 상황에 놓여보기 전까지만 해도, "요새 그런 집이 어디 있어."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녔으니 말이다. 오히려 과거의 관습이 이어져오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녀에게 너무 세상을 어둡게만 보는 거 아니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한 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가사와 육아가 여성의 전유물이었던 관습은 뿌리 채 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봐야 그건 나의 할머니 세대의 이야기이고, 그 짧은 시간만에 오래된 관습의 고리가 끊어진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그렇다면 사랑의 행복으로 의무감을 이겨낼 수 있다는 나의 대답은 틀렸는가. 그 또한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현실 앞에서라도 나는 사랑의 힘으로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혼자라면 포기할 상황에서도, 둘이 있다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의무와 책임의 나의 짐작보다는 더 무거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는 나의 대답 또한 옳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그녀를 이해한 것일까. 적어도 '머리로는'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겪었을 그 모든 감정을 나는 느낄 수 없다. 그렇기에 논리적으로 이해했다는 것만으로는 그녀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그저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의 어떤 측면을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을 뿐이다. 적어도 나의 관점에서는 내가 옳았고, 그녀의 관점에서는 그녀가 옳았다. 그저 결혼이라는 제도를 바라보는 방향이 달랐을 뿐이다. 그녀와 내가 살아온 궤적이 너무나도 달랐던 탓일까. 이미 정해진 가치관은 원한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논리적인 이해로 그녀를 단정 지었던 나의 결론은, 그저 적당한 '납득'에 불과했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이해'했다는 말로써 나의 관점만을 더 고집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녀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당시 나의 태도는 다분히 '시혜적'이었다. 마치 '나는 원래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너의 마음도 알고 있단다'라고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그저 은혜를 베푸는 듯한 표면적인 긍정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건 오만인 동시에 자만이었다.
결국 지금 순간까지도 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네가 되지 않는 이상, 너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네가 되더라도, 그 오래된 노래 가사처럼 너의 마음을 모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섣불리 상대를 이해했다고 하지 않을 셈이다. 이해하려 애쓰기보다는, 상대의 태도를 긍정하고자 한다. 그게 타인을 존중하는 방법이 아닐까. 나의 고집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보는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