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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ttersweet

『오늘의 단상』- 7

by 현재를즐겨라

Bittersweet. 나는 이 영단어를 중학생 시절 아델의 'Someone Like You'라는 노래를 들으며 처음 알게 되었다. 가사 중에서도 유독 그 단어가 기억에 남았던 것은 한국어에도 '달콤쌉싸름하다'라는 같은 의미의 단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권 번역가들이 가장 애먹는다는 우리말이 '노르스름하다'라고 했던가. 그만큼 영어와 한국어는 다르며, 그중에서도 형용사는 특히나 다르다. 그런데도 이 복잡한 형용사에 딱 맞는 단어가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다른 이유로는 어렸던 나에게 '달콤쌉싸름하다'라는 말이 제법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달콤함과 씁쓸함이 함께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옛말에도 감탄고토(甘呑苦吐)라 하였거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거지, 달콤쌉싸름한 건 뭐냐는 말이다. 중학생 시절의 나는 달콤함과 씁쓸함을 '모순'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이제야 '달콤하고도 쌉싸름한' 감정을 조금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나이가 드나 보다. 기억 저편에 멀리 밀어놨던 이 이야기가 다시금 떠오른 건 최근의 일이다.

몇 달 전부터 몸이 많이 나빠졌다. 그 바람에 꽤 오랜 기간 준비했던 것들을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날려버렸다. 그 순간만큼 여러 감정이 교차했던 적은 없다. 낙담하고 무너졌다. 그때만큼 나 자신에게 실망한 적도 없었으며, 나를 응원하던 주변 사람들에게 한없이 미안하기만 했다. 어디서부터 뭘 다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아픈 몸을 수습하느라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할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내 몸하나 건사하기 급급한 나날들이었다. 실망과 죄스러움. 무력감과 고통. 그때의 나를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적확한 단어를 지금도 찾기가 어렵다.

그때 극복을 위해 내가 택한 것은 독서였다. 시간만 나면 책을 읽었다. 활자를 보면 속이 울렁거렸기에, 가벼운 소설책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커트 보니것'의『고양이 요람』의 책장을 뒤적거렸다. 한 10페이지쯤 읽었나, 읽다 보니 그 책이 대략 1~2년 전에 읽었던 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마자 그 뒤의 내용이 줄줄이 생각났다. 계시를 받은 건가. 어쩌면 나도 '보코논교도'일지도 모르겠다. 어이가 없더라. 그 순간 앞으로는 읽은 책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점차 독서와 글쓰기는 나의 하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루틴이 되었다. 하다 못해 하루 한 줄이라도 읽고 쓰는 습관이 생겼다. 이 고상한 취미를 즐기는 동안만큼은 몸이 아프다는 것을 잊게 된다. 몰입의 힘이려나. 소설을 읽을 때면 현실의 나로부터 멀어져 이야기 속의 인물이 되어본다. 반면, 글을 쓸 때면 현실의 나에 대해서 탐구하고 또 탐구한다. 그러면서 나도 몰랐던 나에 대해서 알아간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내가 아니었다가, 다시 내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과정에서 행복을 느낀다.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다독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글을 쓰는 것은 더더욱 나에게는 멀게만 느껴졌던 일이었다. 어쩌면 과거의 쓰디쓴 날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찾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고진감래(苦盡甘來)이려나. 쓰디쓴 날들이 있었기에 달콤한 나날들이 펼쳐지는 것 아닌가. 결국 달콤함과 씁쓸함은 모순이 아니라 '대립'이었다. 단지 그 둘은 점점 진해지고 옅어지는 스펙트럼 위에 있을 뿐이며, 언제든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설탕만 잔뜩 넣은 달고나도 베이킹소다 한 번 잘못 넣으면 씁쓸해진다. 마찬가지로 달콤한 초콜릿도 카카오 함량이 너무 과하면 쓴 맛이 난다.


결론은 이렇다. 아무리 씁쓸한 날이어도, 하다못해 1%는 달콤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달콤한 날에는, 그냥 달콤한 하루를 즐기는 걸로 하자. 굳이 씁쓸한 걸 찾아서 뭐 하겠나. 그런 고로,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건 '달콤쌉싸름한' 매일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숨어있는 달콤함을 찾아내기 위함이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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