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취향인간

『오늘의 단상』- 5

by 현재를즐겨라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과거의 연애에서 내가 항상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그렇다. 과거의 나는 '무취향 인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없었다고나 할까. 예를 들면, 나는 주말에 집에서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에도, 연인이 원하면 기꺼이 쇼핑을 나갈 수 있었다. 열렬하게 원하는 것이 없었던 만큼, 기겁할 정도로 싫어하는 것도 없었다. 좋게 말하면 타인을 위해 모든 걸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나쁘게 말하면 우유부단하고 책임지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확실한 취향 없이 모든 것에 '무던'하다는 것은 여러모로 장점이 많았다.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의 요구사항을 가능하면 다 맞춰주니, 자연스럽게 나의 평판도 좋아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착한 친구'이며, '말을 잘 들어주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난 말이 많은 편이다. 말을 듣기보다는 말을 하는 걸 좋아하는데도, 그 모든 걸 어떻게 가렸는지 모르겠다.

'무취향'은 진짜 '나'를 숨기기에도 좋았다. 나는 평가에 민감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상대가 터부시 하는 상황을 걱정했다. 누군가에게 책잡히는 걸 원치 않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히 다수의 선택을 따르는 편이 안전했다. 혹시 모를 사람들의 실망하는 표정을 보느니, 차라리 남의 손에 이끌리는 편이 편했다. 시계 안의 톱니바퀴처럼 그저 '별 탈 없이' 굴러가는 게 좋았다. 그런 나를 보고 한 친구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얘는 속을 모르겠어."

그러던 나에게 취향이란 걸 가르쳐준 사람이 있다. 누구보다 취향이 명확했던 사람. 밥보다는 디저트를, 액션보다는 로맨틱 코미디를, 단 음료보다는 고소한 음료를 좋아했던 사람. 나의 취향은 어느새 그 사람에게 맞춰졌다. 그와 함께하면서 나는 잘 만든 디저트와 그렇지 않은 디저트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새 영화도, 드라마도, 웹툰도 로맨틱 코미디만을 챙겨보게 되었고, 다디단 프라페를 적당히 골라먹던 나는 고소한 카페라떼의 참맛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남모를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디저트를 먹기 위해 본 식사를 줄였다. 그가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나의 인생영화는 '노팅힐'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최애 음료는 카페라떼가 되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아무 맛도 안나는 카페라떼를 마시는 사람을 이해 못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지어 나는 유당불내증이 있는데도 카페라떼를 마셨다. 나는 그를 사랑했던 만큼, 그가 좋아하는 것들까지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된 계기라고 할까. 그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것도 아니었다. 함께 찾아간 카페에서 나는 늘 그렇듯 아메리카노와 다디단 딸기라떼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나의 결정장애가 극에 달하던 와중에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줬다. "그러면, 아메리카노랑 딸기라떼 두 개 사서 나눠먹자!" 그 순간 나의 고민은 부질없던 일이 되었다. 그런 제안을 받아본 게 처음이었다. 나는 항상 늘 내가 나눠먹자고 제안하는 쪽이었지, 그 제안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시작이었을 뿐, 내가 그를 사랑한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과거에는 항상 그가 있다. 함께 갔던 장소와 함께 먹었던 음식. 함께 보고 웃었던 그 모든 것들. 함께 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나에게는 이유가 되었다. 그가 없는 나의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그와 나는 딱 맞는 취향을 지니게 되었다. 나의 취향은 '그' 자체가 되었다.

가끔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이유를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퉁쳐서 '그냥 너라서 좋아'라는 한 마디로 답을 하곤 했다. 혹시 내가 조금 더 솔직했다면 우리의 결말은 좀 달랐을까. 이별을 맞닿드린 이후에도 난 여전히 로맨틱 코미디에 빠져있으며, 카페에 가면 디저트와 라떼 한 잔을 시킨다.

처음 그가 나를 떠나갔을 때, 나는 그저 나 자신을 질책했다. 다른 어떤 날에는 그가 너무 미웠다. 또 다른 어떤 날에는 그가 미친 듯이 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가 행복해지길 바라게 되었다. 내 곁이 아니라도 말이다.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그에게 배우게 되었다. 그가 떠남으로써 더 이상 나는 '무취향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keyword
이전 04화보늬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