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단상』- 3
문득 치킨이 먹고 싶어졌다. 지금 나는 그중에서도 후라이드 치킨이 먹고 싶다. 바삭한 겉껍질에 숨겨진 부드럽고 촉촉한 속살. 양념파와 후라이드파, 촉촉살파와 퍽퍽살파가 나뉠 뿐이지 치킨을 싫어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혹자는 수 천년 뒤의 고고학자들이 우리 시대의 토양을 발굴할 미래에는, 현재의 인류세(人類世)를 닭의 전성기로 분류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야말로 계세(鷄世)다. 그만큼 닭 뼈가 많이 발굴될 것이란 말이며, 그만큼 우리가 치킨을 사랑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치킨을 떠올리면 친할머니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어린 시절, 항상 만 원짜리 지폐를 쥐어주며, 치킨 한 마리를 포장해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시던 우리 할머니. 과일이라고는 사과 밖에 못 먹었던 날 위해 항상 반쪽짜리 사과를 덩어리채로 깎아주셨던 우리 할머니. 구멍가게를 하셨던 그 시절, 어린 내가 몰래 엿이나 사탕을 빼먹어도 항상 모른 척해주셨던 우리 할머니. 하지만 내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나의 할머니는 허망하게도,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암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친손자로서 문상을 받았다. 꽤 오래전 일인데도 그때 문상객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과거 구멍가게의 단골손님이셨던 한 문상객께서 말씀하시기를, 가게를 찾아갈 때면 할머니는 늘 그에게 '식사는 했냐'고 물어보셨다고 한다. 그러고는 "안 먹었으면 먹고 가. 밥 한 공기만 더 푸면 돼."라고 이야기하며 밥을 챙겨주셨다고 했다. 그는 그 시절 당신이 궁핍했기에, 할머니의 말 한마디와 밥 한 그릇이 그렇게 고마웠었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문상객은 할머니가 뒤에서 몰래 챙겨주던 쌀 한 포대로 할머니를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어렵지 않은 사람이 없던 그 시절, 부족한 살림에도 할머니가 베푼 마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장례식장 안에 가득했다.
그리고 다들 입을 모아 하셨던 말씀이 있다. '왜 좋은 사람은 일찍 떠나는 거냐'는 것이었다. '좋은 사람'이라. 글쎄, 저마다의 답은 다르겠지만, 내가 할머니를 보며 느낀 '좋은 사람'이란, '타인을 위한 생각'을 '타인을 위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거창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단지, 함께 식당을 가면 먼저 수저를 놓아주고, 물을 떠주는 사람. 지하철에 빈자리가 생기면, 자신보다는 조금 더 힘들 누군가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 주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내릴 때까지 엘리베이터의 '열림'버튼을 눌러주는 사람. 그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점점 그런 '좋은 사람'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다들 겉이 바싹 날카로워진 듯하다. 선량한 사람은 피해를 받고 산다는 인식이 팽배해져 간다. 어떤 누군가는 오늘날을, 내가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의 시대라고 한다.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하는 마당에 누굴 돕느냐는 말이다. 또 다른 누구는 '대혐오의 시대'라고 표현을 한다. 젊은 세대와 중장년 세대는 서로를 혐오하고, 남성과 여성도 서로를 혐오한다. 누구는 빨갛니, 누구는 파랗니 우리는 서로를 판단하고, 편을 가르기 바쁘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치킨 앞에서 평등하다. 치킨을 앞에 둔 순간만큼은 우리는 단일대오를 이룰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모두 '치킨'과 같기를 바란다. 겉은 바삭할지언정 그 모두에게 부드러운 속살이 있기를 바란다. 모두가 날을 세우고 사는 이유는, 사실 자신의 부드러운 속살을 지키고 싶기 때문 아닐까. 세상이 어떻다고 판단하기에 나는 아직 너무 부족하다. 그럼에도 나는 희망한다. 우리가 바삭한 겉껍질 대신, 부드러운 속살을 내비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말이다. 그런 세상이라면, 서로를 나누는 건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면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