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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프롤로그> - 가을

『오늘의 단상』- 2

by 현재를즐겨라

연재 계획을 세우고 일단 한 꼭지의 글을 발행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 이거 계절별로 나눠서 써볼까?" 원래 뭐든 처음 생각한 대로 되는 것은 없는 법. 나름 괜찮은 방향같아서 일단 행동에 옮기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뒤늦은 프롤로그'를 써본다. 왠지 반성문같은 프롤로그다.

나는 사계절 중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여러모로 가을이 딱 적당하다. 특히 공기의 온도가 그렇다. 나에게 여름과 겨울은 불균형의 계절이다. 여름에는 뿜어져 나오는 열기 탓에 몸이 더 크게 퍼져나가는 듯하고, 반대로 겨울은 살이 에는 듯한 냉기 탓에 자꾸만 몸이 작아지는 듯하다. 여름에는 예민해지고, 겨울에는 둔해진다. 봄과 가을의 공기를 느껴야지 비로소 내 몸과 마음은 평형을 이룬다.

그 가운데에서도, 나는 봄의 생기로움보다는 왠지 가을의 고즈넉함에 더 끌린다. 음악을 들어도 장조 음계보다는 단조 음계의 음악들을 즐겨 듣는다. 최근에 꽂혀있는 음악도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이 연주한, 윌리엄 볼컴의 우아한 유령. G단조의 곡이다. 꽃놀이보다는 단풍놀이를 좋아하는 것도. 일출보다는 일몰을, 그중에서도 노을빛에 산란된 쪽빛 하늘을 사랑하는 것도. 가을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에어컨 없이는 숨이 턱 막혔던 여름은 지났다. 이제는 창문을 열고 선선한 바람을 느껴본다. 창 밖의 풍경도 사뭇 달라졌다. 하늘의 파란색은 더욱 깊어진다. 산기슭은 노란빛을 더해가고, 그 아래에는 황금빛 들녘이 펼쳐진다. 차가워지는 바람과는 반대로 그 풍경만큼은 점차 따뜻해진다. 그 앞에서 김이 모락 나는 커피를 한 잔 마시며 글을 쓰는 이 마음이란.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묘하게도 나의 시작은 가을이다. 만물이 봄과 여름동안 뿌려둔 씨앗을 거두는 시기에, 나는 새로운 시작을 한다. 생각해 보면 그 조차도 나와 제법 어울린다. 내가 남들보다 빨랐던 건,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던 나머지 예정일을 두 달이나 남기고 태어났던 것 말고는 없었다. 달리기도 느린 편이었고, 손도 느리다. 이제 보니 책도 천천히 읽는다. 사회에서 그럴듯한 자리를 잡는 것도 마찬가지로 늦어지고 있다. 제기랄.

그럼에도 뒤늦은 씨앗을 뿌려본다. 황금빛 들녘이 모두 베어진 뒤에 남겨진 논을 본 적 있는가. 채 수확되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진 벼 이삭들이 잠시나마 푸릇한 새싹을 틔운다. 흔히 떠올리는 황금 들녘과는 달리, 벼를 베고 난 뒤의 논은 제법 푸르스름하다. 물론 그 새싹들은 이삭을 맺지는 못한다. 차가워진 온도의 탓이며, 곧 다가오는 겨울을 견디기에 그들은 너무 연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약할지언정 의지가 약하지는 않다. 끝을 알지만 그럼에도 싹을 틔우는 생명의 힘만큼은 봄의 새싹 못지않게 강하다. '오늘의 단상'의 연재도 언젠가는 끝을 볼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브런치를 찾아오는 작가와 독자분들에게 은은한 푸릇함을 남기고 싶다. 가을이라는 계절에, 남겨진 이삭이 틔운 그 풍경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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