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단상』- 4
가을이 오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바로 '보늬밤'이다. 보늬밤은 밤을 설탕에 조린 디저트로, 몇 년 전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등장한 후 화제가 되어 나름의 인기를 끌었다. 나 또한 영화가 상영되던 그즈음에 처음으로 보늬밤을 먹어봤다. 기가 막히더라. 밤 특유의 식감, 그리고 그와 어우러지는 다디단 그 맛을 잊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큼직한 밤이 떨어지는 가을이 오면 항상 보늬밤이 생각난다. 그간에는 바쁘게 지내느라 보늬밤을 만들어 볼 엄두가 안 났는데, 모처럼 여유가 생긴 데다가 무엇보다도 우연히 크고 맛있는 밤을 얻었기에, 오랜만에 보늬밤을 만들었다.
보늬밤은 다른 것 보다도 손이 참 많이 가고 시간도 많이 필요한 음식이다.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제법 크기가 있는 밤들을 모아 속껍질인 '율피'만 남긴 채, 겉껍질을 벗겨내는 것이다. 이 때, 가능하면 율피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율피가 벗겨지면 밤을 조리는 과정에서 밤이 갈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밤의 겉껍질을 다 벗겨낸 뒤에는 베이킹소다를 넣은 물에 하루정도 푹 담가서 율피 특유의 떫은맛을 빼낸다.
하루가 지난 뒤, 불려놓은 밤과, 발그스름하게 물든 물을 모두 냄비에 넣고 약불에 30분 간 졸인다. 불의 세기도 적당해야 한다. 불이 너무 세면 밤이 쉽게 물러 터질 수 있다. 30분이 지나면 졸여진 밤을 찬물에 헹군다. 끓인 물도 모두 버린다. 다시금 냄비에 밤과 새로 뜬 물을 담고 끓인다. 이 과정을 2번 더 반복한다. 그러니까 총 30분씩 3번을 졸여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짙은 붉은색이었던 끓인 물이 점차 발갛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지막에는 제법 맑아지기까지 한다.
그렇게 총 3번을 졸인 뒤, 마지막으로 밤을 찬물에 헹군다. 그리고는 율피에 붙어 있는 밤의 심지를 이쑤시개로 하나하나 벗겨내야 한다. 질긴 심지가 보늬밤의 부드러운 식감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잘 따라왔는가. 이제 다왔다. 마지막으로 밤의 절반만큼의 설탕과, 밤이 자작하게 잠길 정도의 물을 함께 넣고 약불에 밤을 졸인다. 이때는 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그저 냄비의 물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 때까지 졸이면 된다. 이 모든 것을 마치게 되면 그제야 우리는 맛있는 '보늬밤'을 맛볼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보늬'는 율피의 다른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밤을 쪄먹어나, 구워 먹거나, 심지어 생으로 까먹을 때도, 율피는 특유의 떫은맛 때문에 벗겨내야 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보늬밤에서 만큼은 율피는 주인공이 된다. 만약 율피가 없다면 졸인 밤은 형태를 잃고 흩어질 것이다. 물론 율피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기나긴 인내 끝에서야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보늬밤을 만드는 동안 문득 그 율피가 꼭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내가 알밤의 노란 속살이며,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내가 행동하기에 따라 세상이 마음대로 변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점차 나 또한 세상의 변두리, 혹은 그저 벗겨내야 하는 율피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그 감정을 꽤나 크게 느꼈던 것 같다. 좌절도 심했고, 이루고자 하는 바를 앞에 두고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과거를 후회하는 날이 길었다.
나는 그렇게 한동안 과거에 살았다. 과거를 놓지 못했기에 현재와 미래 또한 모두 놓쳐버리며 살았다. 그렇기에 이제부터라도 현재를 잡아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나는 나 자신을 물에 불리고, 졸여내고 있다. 보늬밤을 만드는 것처럼 길고 지루한 시간을 버티고 있다. 마찬가지로 시작은 붉다. 그래도 계속 졸이다 보면 점차 발갛게, 그리고 언젠가는 맑아지지 않을까. 그 과정 끝에 나는, 지난 과거의 생채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한 '터진 밤'이 될지, 아니면 맛있는 '보늬밤'이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나를 졸여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