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단상』- 11
제법 싸늘해진 바람은 겨울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린다. 그럼에도 한낮의 따스한 햇살은 아직 가을의 온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은 끝자락에 다다른 가을. 여전히 하늘은 청명하다. 그 위를 수놓은 구름 떼는, 무지개를 쫒고 싶던 어린 날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그때는 저 구름을 따라가다 보면 왠지 무지개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무슨 말이냐 하면, "여행을 떠나고 싶다"라는 것이다. 실낱같이 남아있는 가을을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시기인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때가 무르익기를 더 기다리고자 한다.
가을과 겨울을 잇는 11월, 제주도에서는 동백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제주와 동백은 여전히 나에게는 행복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꽤나 오래 전의 여행인데도 말이다. 시작부터 평소의 나와는 달랐기 때문일까. 그날의 제주도 여행은 숙소와 렌터카, 그리고 비행기 편을 제외한 모든 것을 계획하지 않은 '반쯤' 무계획으로 출발했다. 정해진 것은 없었다. 분명 그게 왜 특별한 건지 의아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원래 1시간 단위로는 일정을 정해놔야 하는 나에게 이 정도는 엄청난 것이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렇게 강박적으로 일정을 정해야 했던 것은 나의 불안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모습을 누군가에게 온전히 보여주는 걸 두려워했다. 한때는 이런 나의 태도를, '여행의 동반자를 위하는 마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감정의 실체가 '상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불안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이번만큼은 진짜 '자유 여행'이 하고 싶었다. 정해진 것이 없기에 자유로웠다. 모든 게 편했다. 가고 싶은 곳은 있지만, 가야 할 곳은 없다는 것도. 그리고 나의 이 취향을 받아 줄 수 있으리라 믿었던 사람과 함께였다는 것도.
여행 중에 우리는 갑자기 붉은 동백꽃이 보고 싶었다. 대략 꽃이 필 시기라는 것 정도만 알았던 우리는, 입장 마감 시간도 30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에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동백꽃 군락지에 간신히 도착했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진 그곳에서, 나는 지금까지 마주한 것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되었다. 짙은 녹색 잎 위에 붉게 수놓아진 만개한 동백꽃. 누가 더 아름다운지 겨루고 있는 것만 같은, 그렇기에 더욱 서로가 부각되는 아이러니함. 그럼에도 깨지지 않는 조화로움. 그 앞에서 나는 그저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기에 기대가 적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 광경을 함께한 사람의 덕분일까. 한참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는 그날의 우연한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날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머지않은 시간 후에 두 사람은 이별을 마주했다. 동백꽃과 함께, 나의 기억 한편을 채우고 있는 그 사람은 이제 없다. 그가 나의 모든 것을 받아 줄 수 있으리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긴 시간을 함께한 후에야 비로소 생긴 이 믿음은, 온전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한 용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작 그 용기를 펼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나를 괴롭게 한다. 하지만 알고 있다. 여행에는 끝이 있다. 우리의 제주도 여행도, 아름다웠던 동백꽃도 지금은 모두 저물었다. 마찬가지로 그 우리의 행복했던 시절도 그렇게 끝을 맺었을 뿐이다.
시간은 감정을 무디게 한다. 아프기만 했던 기억을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새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가슴이 저며오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 또한 내가 견뎌내야 할 남은 사랑의 흔적이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 속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만약 너를 다시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너에게 그 구절을 말해주고 싶다. 동백꽃의 꽃말이 '애타는 사랑'인 것은 또 다른 우연일까.
바람이 제법 차갑다. 이제 그곳에는 새로운 동백꽃이 다시 곧 피어날 것이다. 동백꽃이 필 무렵, 이번엔 혼자 제주도를 찾아가 볼까 한다. 추억은 지나간 과거가 되어 기억 속에만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그 장소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길 바란다. 어딘가에 행복했던 그날의 흔적이 남아있길 바란다. 나에게서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너의 흔적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