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콩가루 집안이네!"

유희관 선수의 '느린 공'처럼 살고 싶다.

by 이문희

"학생, 좀 내려와 봐야겠어."

"내려와서 학생 엄마 좀 데리고 들어가"


늦은 저녁 현관문을 열어보니, 아파트 경비원 할아버지가 분통을 터뜨리며 하는 말이다. 집에는 나와 남동생만 있었다.


그때의 내가 16살, 남동생은 14살... 엄마는 44살.

지금 나보다 딱 한살이 많았던 우리 엄마...


사춘기 소녀가 '속에서/ 천불이/ 난다'는 감정을 뚜렷하게 알고 있었다. 목에서부터 명치까지 감당키 힘든 무거운 흉통이 가슴팍을 아리게 했고, 마치 해코지 당하는 빨래처럼 자비 없이 비틀리고 쥐어짜는 심경을 겪어야 했다.







지하실에서-1


경비 할아버지가 엘리베이터에서 볼멘소리를 했다.


"학생 엄마가 술이 잔뜩 취해서, 공용 지하실에 들어갔어"

"좀 나오시래도 말을 들어먹지를 않아... 도대체가"






지하실에서-2


온갖 잡다한 것들이 쌓이고 방치된 퀴퀴하고 컴컴한 곳, 노란색 작은 자전거 옆에 엄마가 고집부리듯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나와, 빨리 일어나."


낮게 짓누르며 엄마에게 으르렁 거렸고, 그다음엔 악을 쓰며 나오라고 소리쳤다. 엄마가 씅이 났는지 나에게 욕을 퍼부으며 내 머리끄덩이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제가 누구의 자식이옵니까?"


기억이 존재할 때부터 엄빠의 현란한 드롭킥, 초크슬램(프로레슬링 공격기술)을 반강제로 독학할 수 있었기에 반사적으로 엄마의 머리채를 잡게 되었다. 엄마가 아프게 당기는 만큼 나 역시 죽어라 잡아당겼다. 엄마와 내가 계단 위를 나뒹굴었다. 남동생이 나를 말렸는지, 경비 할아버지가 나를 말렸는지, 뒤늦게 달려온 엄마 친구가 나를 말렸는지 기억에도 없다.







나의 억울함


억울하다(抑鬱하다)

형용사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하다. 누명을 쓴 것이 너무 억울해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와 내가 씩씩거리며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엄마의 눈은 술에 취해서 잿빛처럼 흐렸다. 평소 엄마와 잘 어울리던 엄마의 친구가 나와 엄마를 동시에 나무랐다.






엄마의 억울함


"야이 X발년아!! 제발 술 좀 그만 처먹어라"

"부끄럽지도 않냐!!!"


엄마에게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다섯 살 무렵 고아가 된 엄마는 어렵게 자랐다. 그런 엄마가 비슷한 처지의 아빠를 만나 고행과도 같은 결혼생활을 했다.






엄마친구의 억울함-1


"X발년아! 우리 엄마랑 술 좀 그만 처먹어라"


엄마친구에게도 욕을 했더니 엄마 친구가 경혹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에게 분명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지만 눈물, 콧물로 뒤덮여 헝클어진 머리를 한 사춘기 여자아이에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 것으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해 격렬하게 억울했다.

하지만 엄마 친구가 제일 억울했을 테지...







엄마친구의 억울함-2


나중에야 알았는데, 엄마 친구는 술도 마실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저 지나는 길에 나와 엄마의 꼴을 말리다가 봉변을 당했다고 한다. 나중에야 엄마 친구에게 사과를 드렸고, 엄마 친구는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빠의 억울함



그날 저녁 내 방에서 주먹으로 끝도 없이 벽을 내려쳤다. 엄빠의 격렬한 고성에 사춘기 소녀의 반항이 묻혔다. 주먹은 그다음 날 까지도 아픈줄도 몰랐지만 목과 가슴 명치 어디께가 골고루 으깨진 것처럼 며칠을 아팠다.


엄마의 기행(奇行)이 부부싸움으로 이어지지 않길 바라며 남동생과 내가 입을 다물었지만, 아빠는 어디선가 이야기를 듣고와 집구석 2차 대전이 발발했다.


그저 열심히 돈 벌고 들어와서 집안꼴이 개판이라며 아빠는 되게 억울해했다.





"아주 콩가루 집안이네"


그냥 '격려'가 필요해 술자리에서 심연 속 아픔을 내보이니, 상대가 조롱하듯 놀렸다. 사실 맞는 말이지,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지금의 나는 그들의 반응도 충분히 이해할 만큼의 어른이 되어있다.






No problem


"너 과거 이야기 함부로 하지 마..."

"앞에서 위로해 주는 척 뒤에서는 흉봐."

"약점 될 이야기 하지 마"



나는 늘 한결같이 "괜찮다" 말할 수 있다.

자세한 설명은 이연복 셰프님의 짤방으로 대체한다.







유희관 선수의 느린 공


"도대체 왜 못 칠까"라는 의문이 드는 ‘느린 공’을 자신 있게 던지는 투수 유희관.


유희관 선수는 “선발로 100개 던지면 100개 모두 전력투구다. 단 하나도 살살 던지거나 대충 던지는 공은 없다”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도 그랬다.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 마음의 병을 앓으며, 병원에 강제입원 해야 했고, 때론 방황하며 방탕하게 살아야 했다.


아쉽게도 유희관 선수처럼 '프로무대'를 영광스럽게는 못 뛰어 봤지만, 지금까지 하던 대로,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버텨낼 것이다.


내 삶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그 안에서 '찰나의 가치'들이 나를 더디게 성장시켜 주었다.



아직까지 이연복 셰프도 아니고, 유희관 선수도 아닌 놈의 왈왈왈 소리를 참고 읽어준 같이 아름다울 당신의 '측은지심'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밤이다.










그동안 겪어내었던 모든 비통함이 푸른 싹 틔우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설령 잡초로 피어난대도... (고관대작의 생명력 보다 무지렁이들의 생명력이 더 길다고 합니다... 뿌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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