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현
오늘의 시 한 편 (80).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도토리묵
주민현
도토리로는 국수를 만들 수도 있고
묵사발을 만들어버릴 거야,
간밤에 한 사람이 엉망으로 만든 거리로
유리가 깨지고 파편이 흩어지고
그 위로 눈이 섞여 내렸어요, 맑은 아침
청소 구역을 정확히 지키는 것이
우리만의 암묵적인 룰,
빌딩 청소부로 고용되어 내내 세상을 훔쳐요
사거리 드넓은 풍경을 훔치고 걸레를 훔치고 커피 향기를
훔치고
십육층 팔층 오층 외로운 사람들의 노래와
담배 연기를 훔치죠
거리를 맑게 부수는 햇빛과 사각 창 안에서 눈을 감아요
세상은 부서진 브라운관이에요
홈비디오 속 푸릇한 아이들은 자라
도둑과 사냥꾼, 부정한 공무원이 되어가죠
흥얼흥얼 라디오 음악 속에서
불법 촬영을 하는 시민과 정오와 체포와
그리고 어디에선가 총기가 발사되고
2100년에는 제주의 겨울이 사라진다네요
세상의 이야기가 모이는
화장실에서는 기분이 좋아요
부끄러운 것이 빙글빙글 사라지니까요
우리의 전부였다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들
세상을 이루는 건 그런 것들
옛날 영화 속에서는
내내 얻어터진 권투 선수가
일어서며 주먹을 다시 부딪칩니다
묵은 중금속 해독에 좋고
갈라도 다시 네모반듯하게 일어서고
네모난 건물 창문을 한입 잘라 먹으며
남모르게 세상의 비밀을 수집해요
소문과 이야기 너머로
습, 습, 숨을 들이쉬면
한꺼번에 나쁜 냄새가 피어오릅니다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세상을 이루는 건 그런 것들
(빌딩을 청소하는 사람의 눈에는 세상이 도토리묵으로 치환된다는 사실이 새롭습니다. ‘나쁜 냄새’를 풍기는 세상의 면면들을 ‘훔치는’ 것이 일상인 화자는 도토리를 데려다가 세상의 나쁜 것들을 모두 부르네요. 도토리묵을 먹여서 그들을 깨끗하게 해독시킬 수 있다면 좋겠어요. 나도 가만히 뒷줄에 숨어서 차례를 기다렸다가 도토리묵 한 귀퉁이를 얻어먹을 수 있다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도토리묵을 권하고 싶습니다. 묵사발 같은 이 세상이 맑고 깨끗하게 해독되는 풍경을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