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현 Apr 25. 2024

18. 파머스 마켓에 다녀오다

뱃줄 달고 미국 여행


일요일 오전, 마운틴 뷰 시에서 열리는 파마스 마켓(parmer's market)에 다녀왔다.

파마스 마켓은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장터를 말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시골 오일장 같은 곳이다.

나는 우리 시골 마을에서도 장이 서는 날이면 특별한 볼 일이 없어도 장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장이 주는 설렘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파마스 마켓의 지정 주차장이 만원이었고 거리와 시장에는 장 보러 나온 사람들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동안 나파밸리와 팔로 알토의 파마스 마켓을 가 본 적이 있었지만 마운틴 뷰에서처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이날 날씨가 좋아서였는지, 아니면 이곳 사람들이 특별히 농민시장을 선호해서 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느 곳보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일요일 오전 마운틴 뷰 파마스 마켓 모습


미국의 파마스 마켓은 우리나라의 시골 오일장과는 역사적 맥락을 달리하기 때문에 나는 미국에 있는 동안 가급적이면 파마스 마켓에 자주 가보려고 하였다. 좋은 농산물을 사는 즐거움도 있지만 미국인들이 파마스 마켓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싶기도 하였다.


내가 미국인들의 소비형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이중이 궁금하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한 얼굴은 거대한 자본을 이용해 세계의 이권을 쥐락펴락하는 탐욕스러운 모습이다. 농업부문에서도 자본력과 기술력을 앞세워 농산물의 경쟁력을 세계최고로 키웠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농산물은 옥수수,  대두, 밀, 감자 같은 농산물과 낙농제품, 소고기, 돼지고기, 가금류 등 축산물이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농업 경쟁력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생산성이다. 인류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채택한 방법은 대규모의 경지에 단일 품종의 농산물을 재배하는 모노칼쳐(mono culture)였다. 모노칼쳐를 하다 보면 토양이 고갈되므로 대량의 비료를 투입하게 되고 농지로 곤충들이 몰려들므로 대규모 살충제를 살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한 환경문제도 심각하지만,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총균쇠>에서 지적했듯이 소수의 작물이 인간 생산의 80%를 점하는 더 심각한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즉 생물다양성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곡물회사들이 카르텔을 형성하면서 소규모의 가족농이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전 세계 굶주리는 인구 가운데 60% 이상이 농촌에 산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거대 기업농이 증가하고 거대식품회사가 살아남고 월마트나 코스트코 같은 거대 유통회사가 시장을 지배하는 시대가 왔다.


이러한 거대화 바람에 맞서 농민들은 생산을 증대시켜 대농장에 저항하려고 했다. 특히 1930년대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농산물이 팔리지 않자 가격 급락에도 불구하고 소득을 올리기 위해 생산을 늘렸다. 이는 다시 가격 하락을 가져왔다. 농산물이 팔리지 않자 일부 농민들이 수확한 채소 과일을 트럭에 싣고 나와 직접 내다 팔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미국에서의 파머스 마켓의 시작이었다.


파머스 마켓은 소비자들에게는 농민이 생산한 신선한 식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어서 좋았고, 농민들에게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수 있어서 서로 이익이 되었다.

이에 연방정부는 1976년  ‘농민, 소비자, 농산물 직거래 유통법을 만들어 파마스 마켓의 발전 근거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까지만 해도 파머스 마켓은 주로 교외 지역의 도로변에서 열렸다. 차를 타고 주변 도로를 오가는 사람들이 주 고객층이었다.


그런 파마스 마켓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2000년대에 불기 시작한 새로운 소비자 운동이었다. 미국인들은 세계화 바람을 타고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도 모를 농산물들이 대형마트 매장을 점령하는 모습에 불안과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환경오염문제가 대두되자 유기농운동이 일어났다. 그와 함께 2005년부터 불기 시작한 로컬푸드(local food) 운동이 소비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때마침 유럽에서 공정무역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다. 이른바 소비자 대각성운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미국의 두 번째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급격히 증가한 파마스 마켓은 도로에서 대도시 한복판으로 입성했다. 주 1회 정도로 열렸던 개장 시간도 주 2회, 심지어 상설로 열리는 곳 늘어나는 추세다.


파머스 마켓이 캘리포니아주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도 흥미롭다. 캘리포니아인들의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자세가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여겨지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에서 히피문화가 시작되었고 캘리포니아의 실리콘 밸리에서 새로운 산업이 시작되었다.


캘리포니아 농식품부 자료에 의하면 2024년 4월 1일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승인받은 파마스 마켓 수만 해도 약 750개 가까이 된다고 한다. LA에 153개, 샌프란시스코에 14개의 마켓이 서고 마운틴 뷰가 속하는 산타 클라라 카운티에도 33개의 시장이 열린다고 한다. 거의 모든 도시에서 농민시장이 열린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캘리포니아에서 불던 바람은 지금은 미국 전역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파마스 마켓에서 먼저 눈에 뜨이는 특징은 매대에 나온 채소들의 모양이 다양하고 색깔이 진하다는 것이었다. 대형마트에서 파는 채소와 과일은 크기나 모양이 일률적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공산품의 경우 똑같은 모양의 제품을 찍어낼 수 있지만, 농산품의 경우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채소와 과일이 규격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버려지고 있다. 그런데 파마스 마켓에서는 모양이 이상하거나 크기가 작거나 큰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두 다 당당히 매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농민시장에서만 누리는 농산물들의 특권이다.   

 

진열된 채소 색깔이 진하다


토마토도 모양은 제각각이었지만 잘 익은 상태의 것을 매대에 내어놓아 먹음직스레 보였다. 익지도 않은 푸른 상태의 토마토를 따서 억지로 익혀 파는 우리나라 대형마트의 토마토와는 보기부터 달랐다.


파머스 마켓에 나온 싱싱한 토마토


대형마트에서 결코 구하기 어려운 상품이 출시되어 소비자들을 기쁘게 하는 상품도 있었다. 예를 들면 호박꽃이 달린 애호박 같은 것이었다. 호박꽃 요리를 해야 할 요리사라면 얼마나 반가운 상품일지 모른다. 뉴욕의 유명 세프들이 파머스 마켓 운동을 적극 지지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꽃이 달린 주치니


과일을 좋아하는 나는 싱싱한 오렌지와 사과, 딸기를 파는 매장을 기웃거렸다.

가격은 결코 싸지 않다. 그런데 샘플 과일을 먹어보니 달고 새큼한 것이 사지 않고는 못 견디게 유혹을 하였다. 근처 농장에서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듬뿍 받고 자란 과일들이다.


오렌지


딸기의 색깔도 내가 본 딸기 중 가장 붉고 탐스러웠다.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것이 아니라 캘리포니아의 태양빛을 받고 자란 위력을 마음껏 뽐낸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붉은색의 딸기


파머스 마켓에는 레스토랑들도 성업 중이었다. 이는 파마스 마켓 개장 당시, 블랜치 매기라는 사람이  매기스 키친 (Magee’s Kitchen)을 연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하루 종일 농산물을 파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이 점심으로 무언가 먹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하여 식당을 열었다는 것이었다.

팔로 알토의 농민시장에는 식당이 더 인기 있는 장소처럼 보일 정도로 도시민들이 나와 식사를 하면서 즐기는 모습이 많았다. 농민시장의 진화인 셈이다.


마운틴 뷰 파머스 마켓에서 나의 발길을 사로잡는 채소가게는 중국인과 태국인이 현지에서 키운 싱싱한 채소들이었다. 나는 태국농민이 키운 모닝 글로리를 반가운 마음으로 한단 샀다. 이렇게 좋은 모닝 글로리를 살 수 있어서 행복했다. 집에 돌아와 매운 태국 고추를 넣고 모닝글로리를 볶아 팍붕화이뎅을 만들었다. 음식맛은 역시 재료이다. 신선한 모닝글로리로 만든 팍붕화이뎅은 맛 있었다. 덕분에 잠시 입안의 호사를 누렸다. 


신선한 채소류 매장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미국 농업은 두 갈래의 길을 가고 있다. 거대 농장에서 키운 농산물을 거대 곡물카르텔이 선점하여 세계시장에 압력을 가하며 팔고 있는 길이 하나라면 미국 소비자들이 보여주는 길이 또 다른 하나이다. 소비자들은 자기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유기농 농산물을 먹으려고 하고, 농민시장에 나오는 못생긴 상품을 즐겨 사줌으로써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지지하고 작물다양성을 지켜주고 있다. 농민이 생산한 제품에 공정한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이런 것이 소비자의 힘이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국가를 유지하는 비결은 두 번째 길에 선 소비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