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현 Apr 14. 2024

16. 몰몬의 땅: 브라이스 캐년과 자이언 캐년

뱃줄 달고 미국 여행


이제 미서부 <그레이트 서클 투어>의 마지막 모습을 적어보려고 한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브라이스 캐년(Bryce Canyon)과 자이언 캐년(Zion Canyon)이었다.  브라이스 캐년은 몰몬교의 초기 정착자였던 에버니즈 브라이스(Ebenezer Bryce)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고 하고 자이언 캐년은 몰몬교의 성지로 여겨지는 곳인 만치 두 곳 모두 몰몬교와 관련이 깊은 곳이었다. 이곳은 바로 몰몬인의 땅인 것이다.


대자연이 만든 거대한 작품들을 눈이 돌 정도로 바쁘게 보고 다니다 보니 캐년의 아름다움에 약간 둔감해질 무렵 브라이스 캐년에 도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워낙 그랜드 캐년이 유명하여 브라이스 캐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들어볼 기회가 적었던지라 가이드에게 브라이스 캐년의 특징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가이드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끝내 설명하기를 거부하였다. 오히려 우리에게 아래만 보고 걷기를 요구하더니 어느 지점에서 앞을 볼 것을 지시하였다. 이른바 인스피레이션 포인트(Inspiration Point)였다.

아! 눈 아래에 펼쳐진 저 아름다운 모습은 또 무엇인가!

강렬한 인스피레이션이 왔다.


반원형 극장 안에 붉은 사암의 뾰족뾰족한 봉오리들이 수천수만 개가 담겨 있었다. 마치 붉은 산호초가 땅에 올라와 피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름다운 붉은 꽃이 활짝 핀 것 같기도 한 것이, 사암의 붉은색이 너무 멋지게 닥아왔다. 도열한 돌기둥과 뾰족한 봉우리들은 섬세하게 깎여 지금까지 우리가 본 남성적인 캐년들과는 완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앞서 사람들이 미인만을 쫒는다고 푸념한 것을 깡그리 잊고 붉은 사암의 여성스러운 우아한 자태에 넋을 빼고 말았다.

미국인들은 저 바위군에다 월스트리트니 중국의 만리장성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금강산의 만물상이 붉은 사암의 옷을 입고 여기 나타난 것 같았다.



금강산의 만물상을 연상시키는 바위군


나의 넋을 빼앗는 저 브라이스 캐년의 아름다운 첨탑들은 바다밑에 쌓인 토사가 암석을 형성하고, 이것이 지상에 융기한 후 물과 바람과 빙하에 의해 깎여 비교적 단단한 암석만 침식되지 않고 남아서 생긴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지금 수백만 년의 세월 동안 자연이 만든 작품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대자연의 합창을 듣는 듯, 하나하나의 바위산과 첨탑들이 조화를 이루어 거대한 하나의 작품을 연주하는듯 보였다.


가이드가 왜 미리 이 모습을 설명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었고 가이드의 작전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직접보지 않고는 이 아름다움을 묘사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하여 훼손시킬 따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에 한없이 펼쳐진 브라이스 캐년의 돌덩이들은 서양사람들은 브라이스 원형극장이라고 표현하였지만 내가 보기에는 커다란 소쿠리 안에 소담하게 담아둔 거인의 장난감들 같았다. 우리는 랏지 인근의 선라이즈 포인트(Sunrise Point)와 선셋 포인트(Sunset Point)를 지나며 브라이스 캐년의 아름다운 봉우리들의 파노라마 풍경을 전망하였다.

이 바위 기둥들을 후두(Hoodoos)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이 사진의 중앙에 위치한 바위가 토르의 해머(Thor's Hammer) 바위라고 하여 이곳 후두 중 가장 유명하여 브라이스 캐년의 상징 돌이 되었다.


토르의 해머 후두


토르의 해머 후두가 보이는 협곡 사이로 사람들이 하이킹하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가이드는 우리에게 하이킹을 원하면 2시간 정도의 여유시간을 줄 수 있다고 하였지만 나는 남편의 엄격한 제지에 걸렸고 우리 일행 중 아무도 협곡 아래의 붉은 모래 갈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우리는 비지터 센터 부근의 벤치에 앉아 대자연의 숲의 노래를 들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으나 뭔가 아쉬웠다. 언젠가 다시 올 수만 있다면 저 아래 협곡 사이를 걸어보고 싶었다. 그 언젠가가 나에게 허락될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으로 우리가 간 곳은 자이언 캐년((Zion Canyon)이었다. 자이언 캐년이라고 읽지만 원래는 성경에 나오는 시온산을 일컸기 때문에 시온 계곡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 같았다. 이곳은 몰몬교도들이 이단으로 몰려 쫓기면서 들어간 곳이라고 한다. 몰몬교도들은 이곳을 성경에 나오는 시온산이라고 생각하여 이곳을 시온계곡이라고 부른 데서 자이언 캐년의 이름이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자이언 캐년의 입구부터 장엄한 바위산이 펼쳐졌다. 과연 시온산의 모습이 이랬을까?


자이언 캐년 입구의 거북등 같은 바위


지금까지 우리가 다닌 캐년들은 캐년 밖에서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는 곳들이었다면 자이언 국립공원은 협곡 안으로 들어가서 캐년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었다. 후일 요세미티국립공원을 방문하였을 때 자이언 캐년을 연상한 것은 두 곳이 모두 협곡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사방에  보이는 것 마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우리는 자이언 국립공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트레일인 엔젤스 랜딩(Angels Landing Trail)까지 걸어갔다. 눈물 흘리는 바위라는 뜻의 위핑 락( Weeping Rock)을 지나 가파른 경사실을 한참 올라가자 그 유명한  엔젤스 랜딩의 정상에 도달했다. 눈 아래에 장대한 자이언 국립공원의 풍광이 펼쳐졌다.


엔젤스 랜딩 루프에서 내려다본 자이언 캐년 모습


사람들이 엔젤스 랜딩의 좁은 바위 공간에 앉거나 서서 대자연의 압도적인 풍광을 감상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다섯 아들을 거느린 한 아버지가 아들 다섯을 나란히 앉혀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하여 내 카메라에도 담았다. 저들은 어쩌면 아이를 많이 낳는 몰몬교인일지도 모른다고 혼자 추측하였다.


다섯 아이가 자이언 캐년의 장관을 바라보고 있다.


나도 이 광경을 남기기 위하여 위험한 바위 가장자리에 올라앉아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나의 오른쪽 손끝에 작은 다람쥐 한 마리가 기웃거린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나의 오른쪽 손끝에 작은 다람쥐 한 마리가 다가와 있는 모습이 찍혔다. 영락없는 한국 다람쥐였다. 모습은 한국 다람쥐인데 몸체의 크기가 영 작았다. 나름 동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우리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자이언 계곡에 살고 있는 이 다람쥐들은 한국 다람쥐가 맞다고 하였다. 자이언 캐년 측에서 한국의 다람쥐를 대거 들여와 이곳에 방류하였다는 것이다.


자이언 캐년의 한국 다람쥐: 사진 <김치군의 내 여행은 ~ing>에서


한국 다람쥐는 칩 멍크(Chip munk)라고 하여 미국의 다람쥐나 청설모와는 다른 종류에 속한다. 특히 한국산 다람쥐는 세계에 유례 없는 앙증맞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모습이 알려지면서 세계인들이 애완동물로 이 다람쥐를 많이 사 갔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으로 대량반출되었고(그 수가 50만 마리라는 설이 있다), 1970년대에는 유럽으로 30만 마리나 수출될 정도였다고 한다. 가난했던 1960년대 한국에서 다람쥐는 주요 수출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땅에서 다람쥐 보기가 쉽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이언 캐년은 바위산이라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하는 곳이다. 이 다람쥐들은 먹을 것이 마땅찮아 몸이 작아진듯하였다. 배가 고픈 다람쥐들은 관광객들이 흘리는 음식 부스래기를 쫓아 이 높은 꼭대기 바위 위까지 올라오는가 싶으니 미국땅으로 이민온 다람쥐들이 가엽게 느껴졌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저녁 무렵에 라스베이거스로 다시 돌아왔다. 명멸하는 휘황한 불빛이 우리가 문명사회로 돌아왔음을 알렸다. 우리와 함께 여행한 다른 팀은 동부의 나이아가라 폭포로 계속 여행을 이어간다고 하면서 떠났고 이제 우리와 가이드만 남게 되었다.

남편은 그동안 우리를 위해 고생한 가이드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였다. 남편이 갈비를 사 줄 테니 좋은 한국식당을 추천하라고 하자 가이드가 이곳 한국식당은 너무 비싸니 베트남 쌀국수를 먹자고 제안하였다. 남편이 강렬한 경상도 말투로 가이드를 나무랐다

“니 내가 돈 없어 보이나?”

그 말에 가이드가

“예 예”

하면서 우리를 한국식당으로 안내하였다.


식당의 사장까지 나와 남편의 뱃줄을 메달 방법을 고안하는 동안 나는 남편의 경관식을 꺼내 발로 살짝 밟았다. 그런데 좀체 경관식이 열리지를 않았다. 보다 못한 남편이 비닐봉지를 세게 내려치자 하모닐란이 분수처럼 폭발하며 식당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종업원들이  밀걸레와 바케츠를 들고 와 뒤처리를 하느라고 수선을 떨었다.

여행 도중 하모닐란의 옆구리거 터져 버리게 된 것이 있었고 오늘 것까지 버리게 되어 이제 남은 남편의 식량이 하나도 없었다. 여유롭게 더 챙겨 오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남편은 다음날 점심때 마운틴 뷰로 돌아올 때까지 배를 쫄쫄 굶어야 했다. 준비성 없는 아내를 만나 남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마나 한국식당에서 먹은 갈비구이와 된장찌개는 그동안의 여독을 날릴 만큼 맛있었다. 나는 가이드에게 구운 갈비를 많이 밀어주었다. 체격이 큰 우리 가이드는 상치에 싸서 갈비를 맛나게 먹었다.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마치 아들 입으로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는 것을 보는 엄마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가이드와 정이 많이 들었다. 가이드는 우리가 한국에 남아있는 제 부모를 연상시키는지 신상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미국으로 유학을 왔던 이 청년은 자기 전공으로 취업을 하였으나 그 작은 월급에 만족하지 못하여 가이드로 나섰다고 했다. 앞으로 자기 여행사를 꾸려보고 싶다는 가이드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다. 작은 여행팀의 묘미가 이런데 있는지도 몰랐다.


저녁을 먹고 가이드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예약한 호텔 로비로 가서 체크인을 할 때였다. 우리 옆으로 다시 가이드가 나타났다.

“왜 또 왔어?”

라고 묻자 그가 씩 웃으며

“그냥 와 봤어요”

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두 노인을 그냥 보내는 것이 걱정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다.

가이드가 카운터의 여성에게 뭐라고 예기를 나누더니 우리 호텔방의 등급을 승급시켰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도착한 호텔방의 광활함에 진짜 입이 떡 벌어졌다. 이렇게 호사스러운 호텔방에 든 적이 여태 한 번도 없었다.

긴 거실을 거쳐 침실에 들어가니 퀸사이즈의 더블 침대가 놓여있었고 넓은 욕실에는 유리문이 달려 샤워하는 모습이 훤히 들여다보이게 만들어두었다. 역시 인간 욕망을 자극하는 라스베이거스다운 발상이었다. 주방에서 요리를 해 먹어라는 건지 주방 시설도 거창했고 거실의 소파하며 식탁 같은 가구도 훌륭하였다.


나는 그때 왜 문정희 시인의  ‘응’이라는 시가 떠올랐는지 몰랐다.


   햇빛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文字)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나는 남편 곁으로 다가가 남편을 살살 만졌더니 배 부근에 매달아둔 뱃줄이 만져졌다. 남편이 슬며시 나를 밀어내며

“당신 어데 아프나?”

라며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리하여 너무 멋진 곳에서 각자의 침대에서 잠을 잤다.

이전 15화 15. 모아브에서: 아치스 국립공원과  캐년랜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