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산책>
양재천변에 의외로 뽕나무들이 많다. 5월 말에서 6월 초, 양재천변을 걷다 보면 땅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져있는 오디를 마주하게 된다. 작은 새들이 땅바닥에 떨어진 오디를 먹다가 사람을 보면 슬쩍 옆으로 몸을 피한다.
오디가 떨어진 땅에서 시선을 들어 위를 쳐다보면 오디가 새카맣게 달린 뽕나무를 볼 수 있다. 나무 위에는 크고 작은 새들이 즐거이 지저귀며 오디를 먹고 있다. 이 순간 양재천에서 새들이 가장 좋아하는 양식이 오디인 것 같다. 벚나무의 버찌도 새들의 식량이 되지만 버찌는 쓴맛이 더 강하다. 오디의 맛은 달고 쓴 맛이 없다. 그래서인지 유독 뽕나무에 작은 새들이 많이 모여 있다. 오디가 익을 무렵 양재천의 새들은 행복하게 보인다.
양재천에 자라는 뽕나무들은 키가 크고 수형이 둥글고 아름다워 마치 느티나무처럼 보인다. 차이라면 줄기의 모양이 다르고 잎이 더욱 크고 반짝거린다는 정도이다. 잠실이 가까워 양재천변에 뽕나무들이 많이 있는 것일까 하고 이해하려다가도 새로 심은 뽕나무들을 바라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양재천 건너편이 잠실(蠶室)이다. 잠실의 잠(蠶)이 누에 잠이다. 잠실은 양잠을 장려하고자 왕실 또는 관부가 특정한 지역에 설치한 누에 치는 장소를 말한다. 왕비가 잠실에 행차하여 함께 뽕을 따고 누에를 치는 의식을 행할 정도로 조선 사회에서 양잠은 중요한 사업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기자가 조선에 누에 기르기와 비단 짜는 기술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기자조선은 시대적으로는 기원전 1100년 경부터 기원전 194년 경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장웨이가 쓴 <제나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라는 책에 의하면 산둥반도에 살던 동이족 나라인 내(萊)나라 사람들의 도기기술, 제염, 제철 기술, 비단방직 기술이 천하제일이었다고 한다. 내나라 사람들은 집집마다 대형 온돌을 설치해 집을 데우고 방 안에 다단식 서랍장 같은 목공예품을 두어 집안을 장식했다고 한다. 이점 때문에 고조선의 이주민들이 산둥반도에 거주하면서 선진 농경문화를 중국에 전파하였다는 고고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 내나라를 제나라가 합병하면서 제나라는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제후 국가 중 최고의 부를 누렸다고 한다. 제나라의 부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수도인 임치에서는 심지어 나무도 비단을 두르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양잠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중국에서는 복희씨(伏羲氏) 또는 신농씨(神農氏) 시대부터 양잠이 시작되었다고 하므로 양잠의 기원은 약 5,000년 이전의 일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고국(古國)>을 쓴 김이오 작가에 의하면 고대 중국에 문명을 가르쳐준 사람들은 동이족이라는 고조선인들이었고, 복희씨(伏羲氏)와 신농씨(神農氏)도 동이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비단을 짜게 된 것은 정말 획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비단은 고운 광택과 몸에 착 들러붙는 특성으로 인해 진작부터 고귀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뽕나무는 매우 유익한 식물이다. 넓적하고 반짝거리는 뽕잎은 영양 만점이어서 누에들이 온종일 이 잎을 먹고 크게 자라서 실을 뱉어내어 비단의 재료를 만든다. 여기서 얻은 비단은 인류의 의복사를 화려하고 풍족하게 만들었고 부를 얻기 위한 인류의 노력이 실크로드라는 문명의 길을 열었다. 그 열매인 오디는 사람들의 인기 식량이었고 지금은 새들의 최고 사랑받는 양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누에와 뽕잎이 당뇨를 낮추어주는 약재로 사용되고 있어 당뇨병 환자들에게 귀한 나무로 여겨진다. 오디의 검은 색소인 안토시아닌은 혈액을 맑게 하고 노화를 방지해 준다고 한다.
중국의 비단은 기원전 1000년경부터 대외수출이 시작되었지만, 부르는 게 값이었기 때문에 비단은 중국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중국만이 비단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비단은 수입국의 흠모의 대상이자 질시의 대상이었다. 중국은 비단 생산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 생산 방법을 극비에 붙이고 누에를 국외로 유출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하였다. 서방의 로마제국에서 비단이 같은 무게의 금과 거래되자 실크로드의 험한 길에는 언제나 비단을 약탈하려는 강도들이 출몰하였고 따라서 대상들은 큰 집단을 이루어 무장한 채 이 길을 지나야 했다.
실크로드의 중간 오아시스 도시에 호탄(위텐국, 현재의 신장위구르자치구 허텐시)이라는 가난한 나라가 있었다. 나라의 가난을 떨치고 싶던 왕은 대상이 실어 나르던 비단을 보고 몹시 탐이 났다. 비단 제조술을 빼내어 왕국의 부흥을 이루고 싶었던 왕은 비단 제조 기술을 가진 나라의 왕녀와 혼인을 약속하고는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몰래 부탁했다. 그 왕녀는 몹시 고민한 끝에 국가의 엄격한 금기를 깨고, 누에 알과 뽕나무 씨를 머리 장신구 속에 숨겨 호탄에 전했다는 것이다. 나는 호탄으로 시집간 그 왕녀를 생긱하며 뽕나무씨가 뽕나무의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였다.
나는 지천으로 떨어진 오디를 집어 들어 자세히 살펴본다. 호탄으로 시집간 중국의 왕녀가 머릿속에 숨겨간 뽕나무 열매는 오디였을까? 뽕의 씨앗은 오디이므로 오디를 심으면 뽕나무가 나올까 하는 의문이 당연히 생긴다. 그런데 이 열매의 어디에도 종자가 숨어 있을 것 같지 않다. 또 다른 장과류인 딸기를 생각해 본다. 딸기를 씹으면 단단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딸기의 종자이다. 그렇다면 오디에도 씨앗이 되는 단단한 부분이 있는 걸까? 오디를 입안에 넣어 살며시 깨물어 봐도 단단한 종자 부분이 느껴지지 않는다. 묘목농원에서도 뽕나무는 묘목으로 팔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오디 종자의 비밀을 알았다. 흰 천을 깔고 오디를 문질러 보자 모래알같은 작은 종자가 나타났다. 아! 감격의 순간이다. 호탄으로 시집간 왕녀는 이 비밀을 알았을까? 그 뒤 이웃 나라인 페르시아로 비단방직 기술이 전파되면서 중국의 독점에 치명타를 날렸으니 왕녀의 스파이 작전은 성공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