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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율 Nov 10. 2024

고된 행군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넘어> 18화

시간은 좀 걸렸지만 흉터가 산에서 그들을 기어코 찾아낼 수 있었던 건 그가 사람을 다룰 줄 알기 때문이다. 무작정 찾아나서기 전에, 흉터는 전날 윤과 설을 지키라고 남겨두었던 남녀 세 명을 불러왔다. 셋은 윤이 폭력적으로 그들을 제압하고 도망쳤다고 미리 말을 맞췄다. 그러나 흉터가 그들 중 한 남자의 엄지 손톱을 뽑고 다시 묻자 말은 제각각 흩어져 중구난방이 되었고, 흉터가 펜치를 들고 여자에게 다가오자 여자는 납작 엎드려 줄줄줄 사실을 털어놓았다. 옆산에서 보던 얼굴이라, 갓난 아기도 있는지라, 자기들은 힘이 없고 그쪽 남자는 건장한지라, 정에 못 이겨 두려움에 못 이겨 보내줬다고, 한낮을 지낼 피난처도 알려줬다고, 어디로 가는지 물으니 고향으로 간다고 했다고, 지금쯤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을 거라고, 안 해도 될 말까지 모두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흉터는 손톱이 뽑힌 남자와 아직 안 뽑힌 남자를 세게 한 번씩 걷어찼다. 오늘 안에 윤과 설의 무리를 찾지 못하면 멀쩡한 손톱이 없을 거라고, 단조롭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마치 오늘도 날씨가 덥군, 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들리는 투였다. 한 치도 틀릴 리 없는 심상한 말을 하는 투였다. 엄지 손톱이 뽑힌 남자는 다른 모든 손가락 끝까지 저릿했고, 아직 열 손톱이 모두 무사한 남자와 여자는 주먹을 모아쥐며 덜덜 떨었다.


윤을 마주한 지금, 흉터는 총 앞에서도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팔꿈치 각도가 직각 정도 되는 수준으로 팔을 옆으로 들어올려 손에 무기가 없다는 걸 윤에게 보였다.


- 초면인데 총부터 들이대시니 이거 참 무섭습니다? 그거 내려놓고 대화를 좀 했으면 싶은데.


윤은 태연한 얼굴로 말하는 흉터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다. 잠을 설치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한 결과였다. 혹시 위험한 상황을 마주하면, 주변에 다른 인물들은 신경 쓰지 않고 무조건 리더에게 - 이 경우 물론 흉터에게 - 총을 겨눈다. 그에게 눈을 떼지 않고, 누가 움직이든 그를 쏜다.  


- 별로 할 얘기 없습니다. 저희는 이 산을 지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 쫓아오지 마시고 그냥 보내주시죠.

- 뭐가 그리 급하신가. 어린 애들도 있는 거 같은데.


흉터가 눈은 윤을 직시하면서도 턱으로 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 우리 귀한 거래인도 같이 데리고서, 우리 구역을 지나가는데, 제대로 보고는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윤 뒤에 선 설이 겨울이를 끌어안고 몸을 옹송그렸다. 선우도 설 옆에 딱 붙어서 손에 든 손전등으로 어디를 비춰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었다. 흉터 뒤에 있던 외팔이와 알비노, 덩치, 그리고 손톱 사건을 겪은 남자 둘이 윤을 둘러싸려는 듯 조금씩 진영을 펼치며 움직였다.


탕!


윤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흉터 옆을 스쳐 뒤쪽 나무 줄기에 박혔다. 슬금슬금 움직이던 남자 다섯이 모두 제자리에 굳은 듯 멈춰섰다. 흉터는 총성과 그 여파에 몸이 한쪽으로 기울며 넘어질 뻔 하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총알은 이제 여섯 발이 남았다.


- 누구든지 움직이면 다음에는 당신 가슴을 쏘겠습니다.


흉터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긴 선이 꿈틀거렸다. 덩치는 말없이 흉터의 태도와 윤의 총을 번갈아 보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굴렸다. 총구가 계속 흉터를 겨누고 있는 한,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지가 많아보였다. 내가 움직이고, 흉터가 총을 맞고, 윤을 제압해 총을 빼앗고, 윤을 죽이거나 보내고, 설은 취하고, 산을 지배한다. 완벽한 흐름이다. 어두운 산 속에서 흉터의 한쪽 입꼬리가 삐쭉 올라갔다. 두 눈썹이 만날 정도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흉터와 대조되는 얼굴이었다.


- 씨발, 아무도 움직이지 마!


흉터의 신경질적인 말을 신호로 삼아 덩치가 다소 돌격적으로 윤에게 다가갔다. 윤은 덩치의 기척을 느끼고 방아쇠 위에 올린 검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 힘이 방아쇠를 제대로 당기기 직전, 순간적인 본능으로 총구를 아래로 30도 정도 꺾었다. 총에서 튀어나온 총알은 쏜살같이 날아가 흉터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여럿의 비명이 산을 울렸다. 윤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윤은 몸을 틀어 자기에게 돌진하는 덩치에게로 총을 다시 겨누었다. 덩치는 바로 멈춰섰다. 그리고 뒷걸음질 치며, 눈알을 굴려 흉터와 윤을 번갈아 보았다. 흉터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꺼름칙했지만 자기가 그린 시나리오는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동에 잠이 깬 겨울이가 찢어질 듯한 울음을 토해냈다. 흉터는 욕설과 비명을 섞어 내지르며 피가 치솟는 왼쪽 허벅지를 손으로 감싸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 선 자리에서 잔뜩 긴장한 채 굳어있거나 두려움에 떨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감출 없는 소동에 산의 구석구석에서 사람과 동물들이 소리나는 쪽을 향해, 혹은 그쪽을 피걸음을 옮겼다. 산이 조용히 들썩였다.


윤의 총은 이제 덩치를 겨누고 있지만, 덩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어둠 속에서 윤과 덩치는 서로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들은 한 편이 아니었지만, 제1의 목표는 같았다. 흉터를 제압하는 것. 그리고 흉터는 지금 쓰러져 있다. 윤은 전날 들은 분열에 대한 이야기로 덩치의 속내를 짐작했고, 덩치 역시 백퍼센트 완벽하지는 않지만 윤 따위 보내주고 흉터 대신 산을 차지하는 게 실속있는 선택이라 판단했다. 둘은 마주본 서로에게서 서서히 뒷걸음질 쳐 멀어지며 무언의 합의를 이뤘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윤이 몸을 돌려 설과 선우, 겨울이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 남겨진 흉터가 괴성같은 신음 속에서도 '저 새끼들 잡아!' 소리를 쳤다. 외팔이가 하나뿐인 팔로 흉터의 상처를 지압하려 했으나 잘 될리 없었다. 덩치와 알비노는 서로 눈짓을 하며 손쉽게 흉터와 외팔이를 포박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입이 가벼운 여자가 손톱이 멀쩡한 남자, 즉 자기 남편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윤이 달려간 방향으로였다. 엄지 손톱이 없는 남자는 당황하다가 덩치를 바라봤다. 덩치는 걸쭉한 욕을 내뱉고는 어차피 별 쓸모 없는 두 남녀 역시 내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손톱 빠진 남자에게 흉터를 업고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흉터는 발악하며 남자의 귀를 물어 뜯었고, 덩치가 총상 입은 상처를 발로 짓이기고 얼굴을 걷어찬 후에야 남자의 등에 순순히 업혀 늘어졌다. 외팔이는 하나뿐인 팔이 몸통에 붙어 묶인 채로 덩치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외팔이는 비틀비틀 걸으면서도 두서없이 덩치에 대한 찬양과 충성을 떠들었다. 알비노가 뒤통수를 한 대 갈기며 닥치라고 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윤은 앞으로 달려가다가 뒤쫓아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멈춰서 총을 다시 들었다. 멀리서 헐떡이며 뛰어오는 남녀는 양손을 들며, 우리도 데려가요, 우리도 같이 가요, 소리쳤다. 윤은 전날 그들에게 산의 상황과 피난처를 알려준 이들임을 확인하고 총을 내렸다. 여자는 윤에게 앞선 상황을 장황히 설명했다. 애초에 흉터가 윤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빼고, 흉터나 덩치나 산의 폭압자이고 자기들은 희생자라며 한바탕 토로한 뒤, 방해하지 않을 테니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 같이 가자고 애원했다. 윤은 설을 바라봤다. 설은 퍽 불안한 기색이었으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윤도 자기 입장에서 그들을 되돌려 보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다 떨어진 누더기 옷 하나를 걸친 맨몸의 중년 부부가 윤의 무리에 합류했다. 여섯으로 늘어난 이들은 걸음을 재촉해 산을 가로질렀다. 두어 시간만 헤매지 않고 나아가면 하산이 가능했다. 그리고 해가 떠오르는 건 세 시간쯤 후일 터였다. 윤은 새로 합류한 부부와 상의하며 길을 찾아갔다. 설은 겨울이와 선우를 데리고 말없이 그들 뒤를 따랐다. 부부의 합류 이후 걸음이 빨라진 윤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자꾸만 솟는 불안은 누적된 피로에 묻혀 흐려졌다. 일단은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만을 생각했다.


구름낀 하늘에는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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