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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율 Nov 03. 2024

장전된 총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넘어> 17화

숨이 턱까지 차고 드러난 살갗에 온통 생채기가 나도 뛰고 또 뛰었다. 남자가 말해준 쓰러진 나무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하늘 끝에서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올 듯 땀이 흘렀지만 빛이 있는 덕에 바닥에 난 구멍이 쉽게 눈에 띄었다. 누군가가 애써 파놓은 듯한 이 간이 구멍은 성인 남자 키 만한 깊이에 옆쪽으로 공간을 조금 더 낸 작은 땅굴이었다. 윤이 먼저 내려가고, 밑에서 겨울이를 받고, 선우가 미끄러져 내려오고, 곧이어 설까지 들어왔다. 모두가 나란히 눕는다면 불가피하게 몸이 닿을 수밖에 없는 좁은 공간, 이들은 각 귀퉁이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토했다. 땀에 절은 겨울이는 엄마 품에서 기진해 잠들어 있었다. 윤이 다시 기어올라가 땅굴의 입구를 가리고 돌아왔다. 가느다랗게 새어드는 아침 빛이 야속했다.


이들이 떠나고 얼마 안 있어 외팔이와 알비노가 돌아왔었다. 윤과 설이 없는 걸 본 외팔이는 그 자리에 있는 남자 둘과 여자에게 욕설을 퍼부으면 역정을 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시간은 없었다. 각자 한낮을 보낼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야 했다.


- 에이씨, 그 새끼들 형님한테 데려가야 하는데……. 씨발!


흥분한 외팔이와 달리 알비노는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덩치에게 가서 상황을 알리고 싶었지만, 흉터는 덩치와 알비노를 붙여 놓지 않았다. 알비노는 속으로 밤이 되면 어떻게든 덩치를 찾아 가리라 마음먹었다. 그전에 흉터에게 윤의 무리를 데려오지 못한 책임을 추궁당할 것이 염려는 되었다. 멍청한 외팔이 새끼. 알비노는 계속 욕을 하며 옆에서 걷는 외팔이를 경멸했다.


- 형님, 못 도망가게 지키라고 붙여둔 놈들이 제대로 일을 못해서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외팔이가 흉터 앞에서 납작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알비노도 옆에 서서 열중쉬어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흉터는 자기 거처에서 여자를 끼고 느른하게 앉아 외팔이의 보고를 들었다. 그가 반라의 몸을 일으키더니 외팔이와 알비노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알비노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윽, 소리를 내며 알비노가 무릎을 꿇었다.


- 죄… 죄송합니다, 형님.

- 어디로 갔을 거 같냐?


흉터 발 밑에서 외팔이와 알비노가 서로 얼굴을 보며 눈치를 봤다. 외팔이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 그… 근처에 낮을 지낼만한 곳이 딱히 없긴 해서… 해 뜨면 길바닥에 쓰러져 뒈지지 않을까 싶은데요…….

- 아까 누구한테 보초를 맡겼다고?

- 3인 1조로 묶어둔, 그 말 많은 여편네 부부랑 칼 쓰는 남자네였습니다.

- 밤 되면 그 셋부터 이리로 데려와. 그리고 뒈졌든 살았든 밤에 그 새끼들 못 찾으면, 너네가 뒈지는 거다.  

- 네, 형님.


낮은 유독 길었다. 윤과 설은 땅굴 바닥에 앉아 졸다 깨다 하면서 지친 몸을 쉬었다. 배낭에 든 음식을 꺼냈지만 커다란 허기에도 불구하고 입맛이 없었다. 선우만 음식을 조금 먹더니 쪼그려 누워 잠이 들었다. 설은 겨울이에게 모유를 먹이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에너지바와 물을 입에 넣었다. 윤은 몸을 틀어 설과 겨울이를 반쯤 등지고 돌아앉았다. 그리고 설에게서 받은 총과 총알을 꺼냈다. 총의 눌림쇠를 앞으로 밀고 실린더를 돌려 실탄을 장전했다. 안전장치를 풀었다가 다시 돌려놓으며 총을 손에 익혔다. 익숙하지 않아서 모든 과정에 시간이 걸렸다. 윤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설은 저 총이 발사되지 않을 때는 그들을 지키는 도구로써 의미가 있지만, 결국 총알이 발사되어 나가는 순간이 온다면 그땐 모든 것이 곧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유의 총이 그러했다. 총을 쏴서 코앞에 닥친 위험 하나를 없앨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험은 몰아닥친다. 하나의 작은 총, 일곱 발의 적은 총알로는 그 위험들을 다 물리칠 수 없다. 세상은 늘 그래왔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건 잠깐의 발악이 될 뿐이다. 한 인간의 발버둥은 매일 더 뜨거워지는 열기도, 점점 더 포악해지는 나와 타인의 마음도 막을 수 없다. 설의 마음은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 체념으로 기울고 있었다. 일곱 번째 총알은 차라리 내 가슴에 날아와 박혔으면. 설은 품에 안겨 색색 잠이 든 겨울이를 꼭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마음이 답답하게 미어졌다.


- 향이 씨.

- 네?


오랜만에 불리는 이름에 설이 놀라 윤을 바라봤다.


- 고단하시겠지만, 밤이 되면 조금 일찍 움직이기 시작하죠. 길을 잃지만 않는다면 모레쯤엔 산을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부터 저희 집까지 또 하루만 걸으면 될 겁니다.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의 말이 희망이나 힘이 된 건 아니다.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지금 해야 하는 일, 설령 세상이 작정하고 방해를 해서 결국 다다르지 못할지라도 내디뎌야 하는 지금의 걸음을 확인했다. 가려는 방향으로 걷고 또 걷는 일.


어김없이 밤이 찾아왔다.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을 나눠서 먹고, 차림새를 정비하고, 땅굴을 나섰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이르게 움직임에도 다행히 더위는 심하지 않았다. 모처럼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었다. 달빛이 가려져 새까맣기만 한 길 위에서 윤은 입술을 꽉 깨물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겨울이와 선우와 설을 끌어올리고, 흐린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걸음을 떼었다. 시간, 시간, 시간. 쉬지 않고 걸었다. 원래는 신경 쓰지 않았던 걸음소리와 말소리를 죽이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변 소리에 기울인 긴장하며 걸으니 피로가 가중됐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설과 선우도 같은 마음이었다. 오늘은 종일 보채지 않고 잠을 많이 자는 겨울이가 많이 고맙고 조금 걱정될 뿐이었다.


새벽의 한가운데에서, 지금까지 온 만큼만 앞으로 더 가길 바라는 마음일 때, 산의 위쪽에서 빛이 보였다. 흔들리며 타는 횃불과 함께 산을 내려오는 걸음 소리들도 들렸다. 그쪽에서도 윤이 든 손전등 불빛을 보았을 터였다. 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전등을 껐다. 안고 있던 겨울이를 설에게 넘기고, 뒤춤에 찬 총을 꺼냈다. 꽉 깨문 입술에서 피맛이 났다. 윤은 설과 선우에게 가까운 나무 뒤로 숨으라고 속삭였다. 그러나 횃불은 이미 서로의 실루엣을 비출 만큼 가까워져 왔다.


-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도둑놈의 새끼들처럼.


외팔이가 낄낄대며 말했다. 윤은 외팔이 뒤에 선 자를 쳐다봤다. 이마부터 눈을 지나 뺨까지 난 긴 칼자국, 저 자가 흉터였다. 흉터 옆에는 알비노와 덩치, 그리고 전날 밤 윤에게 길과 거처를 알려준 세 명의 남녀가 함께 있었다. 윤은 총을 든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 더 다가오면 쏩니다.


외팔이가 하나뿐인 팔을 얼굴 옆으로 들며 표정을 삐죽였다. 흉터와 다른 사람들도 외팔이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윤과 그들과의 거리는 삼사미터 남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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