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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율 Oct 27. 2024

산 넘어 산

장편 연재소설 <이 계절을 넘어> 16화

함께 떠나자는 윤의 말에 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잦아들던 등의 떨림이 다시 일었다. 온 힘을 다해 젖을 빠는 겨울이의 말간 이마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세상과 사람이 함께 미쳐 돌아가는 이 현실 속에서 윤도 답답하고 울분이 치미는 마음에 괜스레 코끝이 매웠다. 같이 가자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사실 당장 내일 길을 나선다면 또다시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두려워하며 죽음을 곁에 두고 걸을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부모, 형제, 가족도 없는 이 한 몸이야 죽든 살든 내가 선택에 대한 내 책임이라고 여겼다. 그런 마음으로 지하 주차장을 나와 무작정 걷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동행인을, 그것도 부모 잃은 열 살 소년과 갓난아이 딸린 연약한 여인을 만날 줄은 몰랐다. 윤은 자기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선택들에 이 여린 생명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윤은 지하 선로에 선우를 두고 올 수 없었고,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과 겨울이를 이 산에 홀로 둘 수 없었다. 인생은 가끔, 특히 지금처럼 정상 궤도를 벗어난 현실 속에서는 종종, 무모한 선택을 요구한다.


- 같이 갑시다.


윤은 선택했다. 이젠 설의 차례였다. 설은 삼켜내던 울음을 그치고, 생각해 보겠다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자리에 누워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선우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윤은 충분히 이해했다. 이날 한낮의 태양은 유독 뜨거웠고, 동굴 안쪽까지도 뭉근한 열기가 스몄다. 아이들은 배를 드러내고 자그맣게 코를 골았다. 어른들은 캄캄한 내일이 불안해 쉬이 잠들지 못했다.


밤이 찾아왔다. 윤은 무거운 눈을 뜨고 묵직한 머리를 일으켰다.


- 선우는 물 뜨러 간다고 좀 아까 나갔어요.


촛불 하나를 켜고 머리를 묶던 설이 인사처럼 말했다. 푹 잠겨서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윤이 네, 하고 답했다. 체감상 한 시간도 채 자지 못한 듯했다.


- 여기를 떠나면, 어디로 가신다고요?

- 제가 어릴 때 살던 백무읍 고향집으로 갈 생각입니다. 강원도 내륙 산간에 있는 시골인데요. 여기서부터는 한 사나흘 걸으면 닿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길만 헤매지 않는다면요.

- 거기에는… 뭐가 있는데요?

- 거긴…… 아무것도 없어요. 시내랑은 한참 멀고, 작은 마을이랑도 삼사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죠. 아주 춥고, 외진 곳이에요. 이런 시기가 아니라면 전 다시 찾지 않았을 거예요. 제 예상이 맞다면, 이 산에서처럼 거기서도 물과 먹을 걸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을 잘 만한 거처는 저희 집을 생각하고 있고요.


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 사실 거기서 잘 살 수 있을지, 거기까지 잘 도착할 수 있을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보다 나을지 아니면 더 나쁠지조차 알 수 없고요. 그래도…….


윤이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말을 골랐다. 겨울이가 옹알거리며 엄마에게서 윤에게로 아장아장 걸었다. 설이 겨울이를 잡으려 했지만 겨울이는 짧은 팔을 휘저으며 열심히 걸어갔다. 윤이 겨울이 앞까지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희미한 빛 속에서도 까르르 웃으며 겨울이가 윤에게로 와 안겼다. 두 팔로 번쩍 들어 공중으로 띄워주니 신난 겨울이가 비눗방울 같은 웃음을 쉬지 않고 터뜨렸다. 복잡한 윤의 마음에도 이 가볍고 무해한 아기의 웃음소리가 따스히 스몄다. 설이 촛불을 들고 다가와 윤에게서 겨울이를 넘겨받았다.


- 거기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같이 있으면 낫지 않을까요. 겨울이에게도, 선우에게도요.

- 원진 씨한테는요?

- 네?


설이 처음으로 윤의 이름을 말했다. 통성명할 때 딱 한 번 꺼낸 이름이라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던, 윤조차도 오랜만에 듣는 본인의 이름이었다.


- 우리가 같이 가는 게 원진 씨한테는 괜히 짐만 되지 않겠어요? 저랑 겨울이는 음식을 잘 찾아올 수도 없고, 괜히 먹을 것만 축내는 격이 될 텐데요. 그렇다고 달리 드릴 것도 없고요. 며칠 같이 지냈다고는 하지만, 남이나 다름없는데.

- 아…….


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윤은 입만 뻥긋하다가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침묵이 잠시 고였다. 그리고 이내 동굴 바깥에서 선우가 풀숲을 헤치고 다가오는 걸음소리가 들렸다.


- 만약에 선우가 없었다면, 저도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선우가 음식을 찾아오고 물을 떠 와서가 아니라…… 그냥 선우가 있어서 저도 더 걸을 수 있었어요. 안 그러면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에서 주저앉고 말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럼, 같이 갈게요. 같이 가요.


설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동굴 안으로 막 들어온 선우가 그들에게로 달려왔다.


- 어? 이모! 우리 같이 가는 거예요? 아저씨, 맞죠? 넷이 다 가는 거죠?


그 와중에 선우는 통마다 가득히 담아 온 물을 꺼내서 윤과 설에게 내밀었다. 혼자 밤 산길을 걸어 이 물통들을 배낭에 다 넣고 오기까지 무겁고 무서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우는 들뜬 기색이었다.


- 응. 다 같이 가는 거야.


출발은 이틀 뒤로 정했다. 그동안 먹을 것을 가능하면 많이 확보해 배낭에 챙겼다. 안정적으로 겨울이를 안고 갈 수 있게 옷들을 엮어 튼튼한 아기띠도 만들었다. 그리고 윤과 설은 지도를 보며 신중하게 루트를 선택했다. 흉터 무리가 있 옆 산을 통과해서 가면 사흘, 그곳을 피해 돌아가려고 한다면 일주일은 걸릴 것 같았다. 설은 남편이 준 칼과, 총, 일곱 발 남은 총알을 윤에게 꺼내보였다.


- 이게 있으니까 빠른 길로 가죠.

- 괜찮을까요? 거긴 무리 지어 있으니 가능하면 피하는 게…….

- 어차피 돌아가더라도 거긴 또 거기만의 다른 무리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돌아가는 길은 더 험할 거 같고요. 혹시, 총 쏴본 적 있으세요?

- 군대에서 사격 훈련으로요.

- 필요할 때 사람도 쏠 수 있다면, 원진 씨가 가지고 계세요. 아니면 제가 갖고 있을게요.

- ……저 주십시오.


길을 아는 설 덕분에 하산은 순조로웠다. 한때 잘 닦인 산책로였던 길을 통과해 흉터 무리산 진입로에 섰다. 함께 떠나기로 한 이후, 줄곧 결연한 모습이던 설의 얼굴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서렸다. 왼손으로는 앞으로 안은 겨울이를 받치고, 오른손으로는 허리 뒤춤에 꽂은 칼을 붙잡았다. 윤은 가늘게 떨고 있는 설의 오른팔을 잡고 조심스레 앞으로 돌려놓았다. 걱정 마세요, 말을 하긴 했지만, 윤 역시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여러 밤동안 지하 선로를 걷고 또 산길을 걸어왔지만, 누군가와 직접적으로 대치를 한 적은 없는 윤이었다. 그 전의 삶 속에서도 말과 모략에 의한 진 빠지는 다툼은 있었을지언정, 총과 칼을 들고 싸움을 대비한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었다. 부디 무사히 이 산을 넘을 수 있기를, 윤과 설은 각자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산의 초입을 지나니 산세가 급격히 험해졌다. 설이 머물던 산에 비해 높고 또 깊었다. 겨울이를 안은 설은 숨을 몰아쉬며 자주 멈춰 쉬어야만 했다. 설과 겨울이의 짐을 대신 진 윤도 숨이 가빠왔다. 좀처럼 진전이 없자 모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나아가는 방식을 바꿔보기도 했다. 설이 앉아서 쉬는 동안 윤과 선우가 이삼십 미터나마 더 걸어가고, 서로의 손에 든 불빛이 간신히 보일락 말락 할 때쯤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선우가 그것을 지키면, 윤이 설 쪽으로 돌아 걸어가 겨울이를 안고 선우 있는 곳까지 왔다. 설은 불안하고 미안해서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었다.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대신 매번 고맙다는 말을 꺼냈다. 윤도 설에게 가쁜 호흡을 들키지 않으려고 말 대신 손끝으로 설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리며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윤이 설과 겨울이를 데려오는 잠깐 동안 선우도 단 일이 미터라도 짐을 앞으로 더 옮겨두려 애썼다.


그렇게 흐르던 밤이 새벽에게 공간을 내어주며 아침을 예고했다. 이제 전진보다는 거처를 찾는 일이 급했다. 윤과 선우가 짐을 내려놓고 낮을 보낼 곳들을 물색했다. 설은 짐 옆에 앉아 지친 몸을 주무르고 겨울이에게 젖을 물렸다. 야위고 고된 설에게서는 충분한 모유가 나오지 않았다. 간혹 칭얼거리는 것 말고는 내내 기특하게 엄마 품에 있던 겨울이가 배고픈 본능을 울음으로 토해냈다. 설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겨울이의 울음소리는 커져만 갔다. 손으로 입을 막고 품에 꽉 끌어안아도 소리는 산을 울렸다. 답답한 겨울이가 더 큰 짜증을 내며 온몸을 비틀었다. 설의 손가락을 깨물며 악을 썼다. 윤과 선우가 놀라서 달려왔다. 그리고 어쩔 줄 모르는 넷 쪽으로 다가오는 걸음 소리들이 더해졌다.


- 어이, 거기!


껄렁한 목소리가 그들을 불렀다. 윤은 다가오는 두 개의 검은 실루엣 쪽으로 서고, 선우와 설, 겨울이를 본인 뒤에 두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이 차가워졌다. 윤은 허리 뒤춤에 꽂은 총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나 총을 꺼내진 않았다. 신중해야 했다.


- 거기 누구쇼? 이 산에 처음 왔소?


서로가 든 불빛으로 얼굴을 희미하게 가늠할 수 있을 거리에서 껄렁한 목소리가 질문했다. 설은 그 목소리를 등진 채 여전히 울고 있는 겨울이를 꽉 안고 몸을 옹송그렸다. 다가오던 이들은 손 뻗으면 윤에게 닿을 만한 거리에 멈춰 섰다. 윤은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전등을 든 사람은 얼굴에 크고 흰 반점이 얼룩덜룩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말을 하는 사람은 오른쪽 어깨 아래로 팔이 없었다. 처음부터 흉터 무리에 속했던 알비노와 외팔이였다. 윤도 설에게 들은 이야기에서 이들을 기억해 냈다. 긴장된 기색을 애써 누르며 의연하게 대답했다.


- 오늘 처음 여기 올라왔습니다. 머물 생각은 없고, 산을 넘어 지나갈 생각입니다.

- 어허, 여기 지나가려면 통행료 내야 되는데. 총 몇 명이오?


외팔이가 알비노를 툭 치자 알비노가 손을 뻗어 손전등을 윤의 뒤쪽으로 비췄다.


- 꼬맹이 하나에, 갓난 놈 하나, 애 엄마까지 총 넷인가? 어라? 근데 이게 누구셔?


알비노의 손에서 손전등을 빼앗은 외팔이가 윤을 돌아서 설의 얼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설은 고개를 돌려 그를 피했지만, 외팔이가 설을 알아봤다.


- 와, 이거 우리 쌔끈한 언니를 여기서 다 보네? 우리 며칠 전에도 봤잖아. 아예 이리로 옮겨 오시려고? 우리야 환영이지. 근데 새 물주를 찾은 건가. 우리 배신하는 거야? 이거 섭한데?


외팔이는 교활하게 웃으며 건들거렸다. 윤이 그와 설의 사이로 섰다.


- 소란 피우고 싶지 않습니다. 조용히 지나가게 해주시죠.

- 아니, 소란이야 우리가 피우지. 그쪽은 뭐 통행료나 내면 되는 거고. 근데 저기 저 여잔 두고 가야겠는데.


그때 알비노가 외팔이 쪽으로 걸어와 손전등을 도로 빼앗고, 나지막한 소리로 외팔이에게 말했다.


- 형님들한테 알려야지.

- 내가 여기 있을 테니 대장한테 갔다 와. 빨리.


외팔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고, 알비노는 그를 대놓고 비웃었다. 네가 혼자 여기 있으면 저기 저 두 팔 멀쩡한 건장한 남자를 잘도 지킬 수 있겠다,라는 의미였다. 외팔이와 알비노 간에 긴장이 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둘 중 하나가 자리를 뜨면 나머지 하나를 제압하고 자리를 피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외팔이가 카악, 침을 뱉더니 왼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삐익, 삑, 삑. 길게 한 번, 짧게 두 번. 산을 찢는 듯한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자 먼 풀숲이 작게 들썩였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외팔이와 알비노보다 행색이 초라하고 삐쩍 마른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이 다가왔다. 과거 긴 머리를 따르다가 흉터에게 제압된 사람들이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 여기 어른 둘, 애새끼 둘 잘 지키고 있어. 우리가 대장 불러올 때까지 여기 꼼짝 말고 그대로. 어? 특히 저 여자 못 붙들어두면 확 다 그냥, 씨발. 알지?


외팔이와 알비노는 서로 두어 걸음 떨어진 채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서로 서두르는 걸음새가 역력했다. 윤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정쩡하게 선, 꾀죄죄한 남자 둘과 여자 하나에게 말을 걸었다.


- 저희는 옆산에서 왔는데, 이 산을 지나갈 계획입니다.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 아까 얘기 못 들었어요? 당신들 가면 우리가 죽어요.

 

칼을 든 남자가 칼끝을 윤에게로 향하며 무뚝뚝하게 답했다. 손전등 든 여자는 머리를 갸웃하더니, 뭔가 더 말하려는 윤 뒤의 설을 향해 말했다.


- 저기 혹시, 옆산에 군인 부인 아니에요? 산에서 애기 낳은.


설이 고개를 들어 여자를 봤다.


- 아유, 맞네, 맞어. 어떻게 애기도 안 죽고 잘 살고 있었네. 아유, 여태 어찌 살았어. 우리나 거기나. 응?


여자는 무릎을 치면서 울먹거리며 말했다. 긴 머리와 흉터의 전쟁이 있기 전, 설도 물 뜨는 계곡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임이 기억났다.


- 아니, 근데 어디로 가려고 거길 나와서 여기까지 왔어? 이봐요, 아저씨. 이 산 나가서 어디 살 데가 있답니까? 아유, 우리도 데리고 가요. 우리도 여기서 죽지 못해 살아요. 여기도 점점 난리도 아니야.

- 이 여편네가 못 하는 말이 없어.

- 우리, 이 사람들 보내줍시다. 우리 다 밀치고 도망갔다고 하면 되지 않겠어요? 지들이 먹을 걸 그렇게 쥐꼬리만큼 주는데 우리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이 사람들 보내주고, 우리도 산 떠나서 살 방법 있나 찾아야지, 지금 이게 사는 거야? 어? 차라리 죽고 말지. 아이고, 아이고.  


여자는 설과 윤, 옆에 선 남자를 번갈아 비추며 한탄을 했다. 남자들도 여자를 구박했지만 여자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굶주림과 체념 속에서 노예의 몸과 노예의 눈을 하고 있었다. 호들갑스러운 여자를 제지하고 칼 든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와 윤에게 물었다.


- 여기 지나서 어디로 가려는 거요?

- 제 고향으로 갑니다.

- 고향이 어딘데?

- 백무읍 부근입니다.

- 백무읍은 강원에서도 깡시골 중에 깡시골인데. 거기 뭐가 있소?

- 잘 모릅니다. 그래도 사람 없고 산이 깊어 지낼만할 거라고 생각하고 갑니다.

- ……자, 여기 한 대 치시오.

- 네?


남자가 칼을 내리고 윤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 보내줄 테니까 한 대 치라고. 그냥 보내줬다고는 말 못 할 거 아니오.


남자가 고개를 꺾어 뺨과 턱을 윤이 치기 좋게 갖다 댔다. 윤은 남자 말을 알아듣고 고맙고 미안한 심정으로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휘갈겼다. 아주 세게 치지는 않으려 했는데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남자는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호들갑 떨던 여자와 그 옆에 남자는 초조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넘어진 남자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 시간이 없으니 잘 들어요. 여기 상황과 오늘 낮을 보낼 만한 곳을 알려줄 테니.


남자 말에 의하면 흉터 무리 내부에 분열이 있었다. 흉터와 외팔이가 한 편이고 덩치와 알비노가 다른 편이었다. 외견상으로는 여전히 흉터가 대장 역할을 하고 있지만, 덩치와 알비노의 불만이 커지는 중이다. 보름과 그믐 때 설을 찾아오는 것도 처음엔 흉터 혼자이거나 흉터와 덩치 둘이었지만, 근래에는 흉터와 외팔이였다. 알비노는 덩치에게 흉터를 치자고 몰래 계략을 꾸미고 있었고, 덩치도 흉터가 유에게서 빼앗은 총만 아니면 언제든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흉터는 이런 낌새를 눈치채고 덩치와 알비노를 억눌렀다. 사람들을 감시하는 역할에서 음식을 직접 구해오도록 시키기도 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덩치에게 발길질을 하며 위아래를 과시하기도 했다. 흉터는 잘 때도 총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상층부 분열 속에서 하층부 사람들은 더 죽어 나갔다. 흉터가 요구하는 분량의 음식을 갖다 바치는 것에 더해, 뒤에서 몰래 덩치가 협박해 요구하는 추가 식량을 더 덩치에게 헌납해야 했다. 덩치에게 반항하며 흉터에게 말하려는 남자 몇몇은 덩치 손에 맞아 죽었다. 여기서 누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는 진실과 무관하게 얼마든지 거짓으로 꾸며졌다. 산을 탈출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교활한 외팔이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서로 감시하게 만들었고, 배신자나 탈주자를 신고하는 이들에게는 하루이틀 치 꽤 넉넉한 식량을 제공했다. 폭정과 밀고 속에서 사람들은 픽픽 쓰러졌다. 더위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었다. 산 사람들은 시체를 뜯어먹었다.


남자는 흉터 무리가 아마 자기들을 때리고 욕할지언정 죽이지는 못할 거라고 말했다. 여기서 사람들이 더 죽으면 흉터에게도 타격이 있을 터였다. 윤과 설은 남자에게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선우와 겨울이를 안고 귀를 막아주었다.


- 저쪽 방향으로 20분쯤 빠르게 달려가서 쓰러진 나무 쪽으로 바닥을 더듬어 보시오. 넷이 들어가기엔 좀 좁아도 하루 낮은 어떻게든 날 만한 공간을 찾을 수 있을 거요.


윤과 설은 그들에게 고맙다고 거듭 인사하고, 걸음을 떼었다. 윤이 겨울이를 안고, 선우가 설의 손을 잡아끌며 있는 힘을 다 짜내 남자가 알려준 곳으로 달렸다. 손전등 불빛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칭얼거리는 겨울이의 입을 틀어막으며 나아갔다. 넘어지면 굴러가면서 다시 일어났다. 무성한 나뭇잎 틈 사이로 먼 하늘부터 동이 터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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