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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에게 Jan 25. 2024

독수리 찾기

윤동주 <간>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멧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나는 살아있다. 물기 머금은 습한 간을 지니고 살아 답답함을 지니던 것도 잠시, 지금 나는 살아있다. 간을 지켜야 한 목숨 보전하는 토끼도 한 마리 두었다. 매일 들여다 보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무의식 속에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기 위해 깡총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언젠가 와서 내 간을 쪼아먹을 독수리를 기다리며, 나는 살아있다.


너는 살찌고, 나는 야위어야지. 내 정신적 자아의 성장을 위해 현실의 내가 야위어야한다니. 독수리도 살찌고 나도 살찔 수는 없을까? 어렸을 때는 양념치킨을 참 좋아했다. 지금은 너무 짜고 손가락에 붙는 치덕치덕함이 불편해서 좋아하진 않지만, 그때는 유독 달고 짠 것들이 입안에 들어오면 꼭 온 몸의 세포들이 춤추는 것 같은 행복감이 있었다. 불행히도, 양념치킨을 양껏 뜯을 만큼 유복한 편은 아니었다. 오랜 음주에 병원에 누워 계시는 아빠를 뒤로 하고, 혹여나 병상을 떠나시면 서울에 있는 코딱지만한 주택 하나가 장녀인 내 앞으로 떨어질까봐 '가처분 신청을 풀어달라' 득달같이 달려들던 고모와 작은 아빠, 그리고 그들을 정에 못 이겨 문전박대하지 못하는 우리 엄마가 아득바득 나를 키웠다. 빼닥구두(우리 엄마는 꼭 뾰족한 구두를 빼닥구두라고 불렀다.)를 신고 다니며, 우리 집 가장으로서의 첫 발을 디딘 엄마는 이름도 못 들어본 대출 은행에 원금과 이자를 갚는다고 허덕였다. 엄마의 새벽 한숨으로 그 작은 집은 꽉 찼을 거다. 어쩌다 엄마가 양념치킨을 사들고 오는 날이면 나도 동생도 부리나케 작은 상 위로 달려들었다. '빨리 먹으면 하나라도 더 먹겠지'하는 마음으로 씹는 방법도 모르는 식사였다. 그 한 마리가 왜 그렇게 작게 느껴지는지. 손가락 쪽쪽 빨며, 모자란 듯한 얼굴로 빈 상자를 보고 있노라면 엄마는 다음을 기약했다. 그 '다음'에는 우리 집 그늘보다 더 거대하고 무거운 책임감이 짓눌려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게 내가 살찌고 네가 야위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내 독수리는 경제적 풍족이었다. 엄마의 희생은 나에게 부채감을 안겨줬고, 무의식 중에 나는 장녀로서 이 집을 건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를 해도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내가 더 많이 벌었으면 했고, 모자람 없이 사는 삶에 대한 열망으로 그득한 사람이었다. 어릴 땐 그게 희망이었다. 지금 이렇게 장판 밑이 누수로 샌 물로 찰랑여도 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를 제치고 높은 공기를 마셔야겠다는 다짐이 때로는 원동력이 되었으니까. 그 '어느 날'을 위한 현재의 발장구라고 치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내가 간과한 것은 그 의지에 시간 제한이 있다는 거였다. 나는 나이를 점점 먹어가고 희망만 가지고 살기에는, '지금은 그 발돋움 단계니까'하고 안위하기에는, 현실은 내 발뒤꿈치처럼 두텁고 견고하다. 그리고 너무 부풀어진 희망에 낙오감도, 자격지심도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감정으로 목끝까지 채우고 나면 스스로가 꽤나 멋없다는 생각에 눈물도 났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학원 강사로 일했다. 또래보다 적어도 두 배 이상은 벌지 않았을까. 그런데 학원은 경제적 풍족의 독수리를 키우고 있는 사람들 천지다. 주말도 저녁도 포기해 가면서 수업을 쳐내야 하는 그들은 아이들을 키워내겠다는 사명감으로 일하지 않는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옆 강의실 선생님보다 더 전문적인 선생님처럼 보이기 위해서 누군가를 깎아내리기도 하고, 내 학생 아닌 학생에게 인사하면 '학생 뺏어간다'고 눈에 불을 켠다. 실력주의 사회에서 나이가 어리다고 후려쳐지는 것은 물론이고, 많아도 마찬가지. 물리적으로 고된 삶을 살아야 하니 야위는 것이 당연지사지만 살찌는 것이 경제적 허영심이면 이 또한 멋있는 삶은 아니었다. 곧은 의지를 가지고 제 위치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에 모멸감을 느끼고 나니 내가 원하는 삶이 '경제적 풍족'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명언에 행복은 돈으로 99%만 살 수 있을 거라고 응수하던 말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게 현실이고 블랙코미디라며. 하지만 그 돈을 지키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들이 여럿이라면, 지극히 내 차원에서는 똥값처럼 보인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난 그 어린 날 그 작은 집에서 내가 치킨을 열 마리는 살 수 있는 재력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모자람에 엄마가 눈물 짓는 것이 마음 아렸던 거라고 생각하니 이제껏 나는 독수리를 잘못 키웠음이 분명했다. 돈보다 더 모호하고 추상적인 가치 아닌가. 내 독수리는 무엇이 되어야만 할까.


나는 프로메테우스를 만나고 싶다. 세상은 각박하고 삭았으니, 그 속에서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멧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를 만나고 싶다. 내 주위에서, 어쩌면 내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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