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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에게 Jan 25. 2024

추악한 세상

<그럼에도>

달리고자 하면 이 세상 또한 원심적이라는 것을 깨달을지어다

갖고자 하면 소유하고자 하는 이 마음이 죄악이라는 것을 깨달을지어다

사랑하고자 하면 사랑을 받아야 내어줄 힘이 생긴다는 것을 깨달을지어다


그럼에도




겨울이 지나간다. 겨울만 되면 귤을 까먹는 사람의 손이 노랗게 물들어, 손만 봐도 '귤 먹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내 배꼽을 잡았다. 겨울에는 꼭 그렇게 이부자리를 뜨겁게 데워놓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엎드려서 귤을 까먹고 싶다. 사실 썩 매일을 귤을 찾는 귤쟁이는 아니지만, 그렇게 겨울을 나야 봄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는 마음도 든다. 대조가 주는 힘이다. 바깥이 차야, 따뜻함이 나른하고, 까기 귀찮아야, 귤이 달다. 


나는 겨울에 먹는 귤이 더 맛있는 이유를 아는 게 아니라면 세상을 '사는 척'한다고 생각한다. 하루가 이렇게 춥고 내일도 추울텐데, 빈 나뭇가지에 녹음이 차도 다시 겨울은 올텐데, 혹한을 견디려면 대조의 힘을 알아야 한다고.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알지 못하면 눈을 감은 채 세상을 사는 거라고. 그렇게 나만의 고집을 만들었다. 


'가랑비에 젖지 않는 사람은 소나기에 이미 젖은 사람이야.'


가랑비에 젖는 사람을 밀어낸 적이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 잡을 데가 없었다. 머리결은 항상 윤이 났고, 거스름 없는 손끝에 손톱도 정갈했다. 얼굴에 그늘이 없었고, 그만큼 아픔에 공감하기도 쉬웠다. 나의 아픔은 항상 그 아이가 배운 아픔 그 이상의 것이었으니. 다정도 공감도 돈으로 살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그런 모습이, 내 가난한 동네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이라 미시감이 들기도 했다. 언제는 그 아이가 술 한 잔을 기울이며, 눈물을 쏟아냈다. 그 아이는 유복했고, 나는 함께 눈물 흘리지 못했다. 평생 먹고 살 돈이 있다는데 무엇이 그렇게 고민일까. 나는 평생 이 아이의 어떤 아픔에 공감할 준비가 못 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일방적으로 멀어지기로 했다.


내가 연애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다. 후천적으로 가지게 된 장애였는데, 처음 장애를 가지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 '엄마에 대한 걱정'이라고 했다.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한 걱정보다 엄마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사람이라니. 술 한 잔 기울이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울었다. 좌절이 뭔지 아는 사람이다. 달려도 제자리에서 맴돌 세상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그 소유에 대한 욕망이 날 더 지옥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사랑 받아 보아야 그 사랑을 타인에게도 베푸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 알 것이다.


사실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눈물을 이건 가랑비야, 소나기야 판단할 수는 없다. 내가 없는 무언가에 대한 자격지심을 대화의 때 아닌 타이밍에 느껴버린 졸렬한 사람이라고 형용해도 무어라 변명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세상의 추악함을 나와 같은 결에서 느껴본 적이 있고, 그럼에도 없는 사랑을 쥐어짜 볼 동반자가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이룰 수 없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무엇도 가질 수 없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베풀고 싶은 만큼 사랑 받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산다. 그런 세상이라 산다.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하는 내 몸짓과, 없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 간절히 희망하는 그 울림에서,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을 해보고자 감정과 상대를 관찰하는 그 시각에서, 사람 내음새가 난다. 오히려 세상이 추악해서 아름다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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